스트레스는 수용성이니까

내가 수영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

by lalageulp

새벽수영 일기 10


달리기에만 '러너스 하이'가 있는 게 아니다.

달리기를 일정 시간 이상 계속하면 어느 순간 몸은 힘든데 기분은 오히려 좋아지는 상태가 오는 지점을 '러너스 하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엔도르핀, 엔도카나비노이드 같은 물질이 분비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기분 좋은 몰입상태가 되기 때문에 달리기를 시작하면 끊을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수영에서도 비슷한 상태가 있다. 러너스 하이 같은 쾌감과는 조금 다르지만 명상에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스윔스 플로우? 물속에서 잡생각이 사라지고 조용히 집중되는 상태로 뭔가 안정감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마도 그건, 물속이라는 공간이 가진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속은 숨을 쉬는 인간에게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익숙했던 방식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을 뭉게 버린다. 시야도 소음도 심지어 우리의 생각마저도 말이다. 마음대로 숨 쉴 수 없고, 몸을 편하게 둘 수도 없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작은 동작 하나에 신중해지고, 어떻게 호흡해야 할지에만 더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하나하나가 맞물리며 더 편하게, 더 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아도 호흡과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시작한다. 이때, 동작은 굉장히 동적인 행위를 하면서 생각은 완전히 정적인 상태에 머물게 된다. 머릿속에 맴돌던 수많은 단어들은 물에 용해되고 마음은 평온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명상과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태초에 인간은 엄마의 뱃속에서 양수 속에 잠겨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가. 어쩌면 물은 우리가 가장 안락함을 느끼는 공간이었다는 것을 잊고 지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바다를 찾는 것 역시 물과 함께했던 우리의 기억, 혹은 DNA 속에 새겨진 본능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직장이나 육아로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에게 늘 한결같이 수영을 해볼 것을 권한다.

단순히 수영이 좋아서라기 보다 정말로 스트레스는 수용성이기 때문에 수영장에 들어가면 무거웠던 걱정과 고민들이 금방 가벼워질 테니 말이다.


수영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더라.

물과 함께했던 기억, 혹은 DNA 속에 새겨진 본능으로 인해 우리는 물과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물속은 안락함을 주면서도 동시에 생존이라는 위협을 안겨주는 공간이다. 그래서 물속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몸은 움직이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고, 이 몸부림이 수영을 할 줄 알게 되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동작으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건 달리기와 비슷한 동작을 취하고 있지만 수영은 달리기보다 좀 더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 운동이다. 호흡을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맞서 싸워야 하고, 나를 감싸고 있는 물체(물)를 밀어내며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곧장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물론 생활스포츠 안에서의 수영은 안전하게 이루어진다. 생존을 위협하는 장소는 아니지만 25m 구간을 왕복해서 돌아오게 되면 짧은 거리일지라도 이 구간을 정복하여 생존했다는 감각이 남는다. 어쩌면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본능인 이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수영을 계속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방해하는 저항 속에서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도달할 수 있다는 것.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방식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바퀴가 두 바퀴가 되고, 두 바퀴가 세 바퀴가 된다. 이제 나도 어느 정도 중급반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꽤나 앞 사람을 따라 제법 잘 도는 수준까지 오게 되었다. 가끔은 외적 방해만 없다면 계속 헤엄 칠 수 있을 것만 같은 경지에 이를 때도 생긴다. 수영은 어떤 지점을 통과했다는 완전한 성취가 있는 운동은 아니다. 그저 단순히 반복되는 과정을 매일 이어나가야 하는 운동이지만 이 안에는 더 잘 해내고 싶은 욕구가 존재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수영을 시작하면 끊을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다.


어떤 이유가 더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수영장을 가게 되면 둘 중 하나는 꼭 느껴보기를 바란다.




에필로그


나는 매일 새벽 6시 새벽수영반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나에게 수영은 상담 못지않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 주었고, 내게 말해준 것이 참 많이 있었다. 그동안 수영장에서 느끼고 겪었던 에피소드들이 아직 더 많이 남아 있지만 나의 수영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보려 한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이 수영일기를 남기기 위해서 였는데 오래 걸렸지만 이렇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된 나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저 이 글을 읽은 분들이 재밌게 읽어주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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