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방을 나온 기남과 연주는 어색한 몸짓과 표정으로 호텔 밖을 배회 중이었고, 저 멀리에선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와!”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탄성과 함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에서 아련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발견하고 급히 고개를 돌려 다시 석양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저녁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둘은 룸으로 돌아왔다.
“먼저 씻어!”
연주가 기남에게 말했다.
“그럴까?”
기남이 욕실로 들어간 사이 연주는 생각에 잠겼다.
기남이 자신에게 결혼을 제의하던 그날을 떠올리며 찬찬히 순간순간을 되짚어봤다.
‘정말 날 박재국 손아귀에서 벗어나게만 하려고 결혼하자고 했을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어떻게 결혼이란 인생 대사를 결정할 수 있지? 아님...’
아무리 생각해도 기남의 마음도, 자기 마음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기남이 싫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지가 되고 그와의 미래까지 상상해 봤던 자신이 부끄러워져 연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 곧 기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 다시 한번 골몰하기 시작했다.
‘기남이 날 좋아할 이유가 없지. 단 하나도! 내가 사근사근하길 하나, 걘 유학까지 다녀온 마당에 난 대학도 졸업 못 하고, 번듯한 직장도 없고’
이때 욕실 문이 열리며 기남이 파자마를 입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엄마, 아니 이젠 어머니라고 해야지.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파자만데 아주 편하네. 너도 어서 씻고 입어 봐. 촉감도 아주 좋아.”
평소와 비교해 말수가 많아진 기남이 이상하다는 듯 연주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왜 그래? 방금 세수하고 나왔는데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냐, 됐어. 나 씻을게.”
연주가 급히 욕실로 들어가자, 이번엔 기남이 욕실 문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왜 저러지?”
기남은 가운데 놓인 침대를 바라보며 다시 혼잣말을 이었다.
“어쩐다? 침대는 하나고...”
잠시 후 연주가 욕실에서 기남과 똑같은 커플 파자마를 입고 등장하자 기남은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 내가 입을 땐 모르겠더니 네가 입으니까 완전”
“뭐래?”
“뭐랄까? 우리가 무슨 병아리 한 쌍도 아니고 말이야.”
“어머니가 애써서 마련해 주신 거니까 그냥 아닥해라!”
“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닥이라니?”
“아! 유학파께선 모르는 단어겠군! 아닥이란”
그때 기남이 잽싸게 말을 받았다.
“독일말인가?”
연주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독일말? 크아악! ”
진지해진 기남의 표정을 보고 연주가 웃음을 멈췄다.
기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만하고 이리 와 봐.”
“뭐? 왜?”
연주가 얼굴이 불콰해지는 걸 느끼며 반문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기남은 다시 한번 차분하게 말했다.
“어머니께 전화드려야지. 잘 도착했다고. 이미 너무 늦긴 했지만.”
연주는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자기 속내를 혹시 기남이 눈치챌까 두려워 잽싸게 기남 옆으로 다가갔다.
전화기를 든 기남이 오퍼레이터를 통해 서울로 전화 통화를 요청했다.
“어머니! 네. 저희 잘 도착했어요. 오늘 힘드셨죠? 잠깐만요. 연주 바꿀게요.”
기남이 전화를 연주에게 넘겼고 연주가 전화기를 받아 안부 인사를 전했다.
“어머니! 네. 잘 먹고 들어왔어요. 네. 다 감사합니다! 네. 기남이, 아니 이 사람 바꿀게요.”
기남이 좀 더 대화를 잇다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두 사람은 다시 어색한 분위기에 휘감겼다.
“우리 맥주나 한잔할까?”
기남이 제안하자 연주가 맞장구쳤다.
“그럴까?”
기남이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 잔에 한 잔씩 따랐다.
두 잔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와 연주에게 한 잔을 건네자, 연주가 받아 들며 외쳤다.
“우리의 앙큼한 결혼생활을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둘은 건배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간간이 둘은 눈이 마주치면 다른 곳을 쳐다보며 어색함을 덜었다.
맥주잔이 비자 다시 할 일이 없어진 기남과 연주가 잠시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기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테레비 볼래?”
“됐어!”
기남이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뗐다.
“그럼 우리 이만 잘까? 피곤하지, 너도?”
“응? 응! 그래 자자!”
둘은 침대 근처로 왔고 기남이 연주에게 운을 뗐다.
“레이디 퍼스트니까 네가 먼저 선택해. 오른쪽? 아님 왼쪽?”
“응? 난 왼쪽 할게.”
연주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왼쪽으로 가 컴포터 속으로 들어갔다.
기남이 오른쪽으로 가 컴포터를 들춰내더니 그 밑에 있는 시트를 끄집어냈다.
“이걸 먼저 다 꺼내야 해. 이 안으로 들어가 자는 거거든.”
“응? 이게 이불 아니야?”
연주는 호텔에 처음 와 보는 거라 컴포터를 이불로 착각했다.
해서 기남의 설명을 듣고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그저 기남이 하는 걸 바라만 봤다.
“자 이제 됐으니까 어서 자자! 정말 긴 하루였다!”
다음날 둘은 일찍 눈이 뜨여졌다.
하지만 먼저 일어난 티를 내지 못하고 둘은 그대로 누워 있었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기남이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네. 감사합니다.”
연주가 그제야 깬 척하며 기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흥식이 형이 알려줬거든. 모닝콜 주문하면 편하다고.”
기남은 이렇게 둘러댔다.
하지만 기남은 연주를 배려해 아침 식사를 룸으로 배달시켰고, 그에 대한 확인 전화를 받은 거였다.
잠시 후 식사가 배달됐고, 연주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어떻게 아침을 룸에서 먹을 수 있지?”
“그러게. 신혼부부한텐 다 이렇게 해 주나?”
역시 기남은 얼버무렸고, 연주는 그걸 믿는 눈치였다.
둘은 편하게 룸에서 식사를 마치고 제주 관광에 나섰다.
관광하는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기남은 어차피 이번 생을 마치고 다음 생이 되어야 진짜 자기 삶이 펼쳐질 거라는 걸 알기에 지나치게 연주에게 잘해줘 그녀가 자신의 부재 후 힘들지 않기를 바랬다.
자기는 민식과 윤식을 만나 이전 삶에서 못 해 줬던 걸 만회해야 하고, 아내 혜린에게도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했다.
이번 생에서 자신이 해야 할 급선무는 남은 가족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초를 단단히 다잡는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또한, 아버지가 몇 년 전 시작한 장애 복지, 보육원 사업도 역시 정남이를 통해 계속 뜻깊게 이어 나가야 할 거라고 다짐했다.
자신과 계약 결혼까지 결행한 연주를 위해 그는 최대한 거리를 두면서 자신이 떠난 후에도 그녀가 자립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출 생각이었다.
반면 연주는 비록 자신이 먼저 계약 결혼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계부 박재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남을 이용하긴 했지만, 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하면서 꽤 불편한 심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비정한 엄마를 대신해 동생 지우를 보살펴야 할 사람이라 생각돼 여자로서의 행복에 대해선 이미 포기를 했을지언정 선량한 사람을 이용한 것에 대해선 죄책감을 버릴 수 없었다.
게다가 자기는 기남을 남자로서도 이미 많이 좋아하고 있지만 워낙 철옹성처럼 비집고 들어간 틈을 안 보이는 기남의 마음을 잡을 순 없을 거라고 지레 포기하는 마음이 됐다.
동시에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기남이 야속하기도 해서 가끔 딴지를 걸기도 하지만 역시 기남은 난공불락이라 속이 많이 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신혼여행은 동상이몽 속에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남과 연주를 위해 인희는 잔칫상에 버금가는 상차림을 마련해 놓고 그들을 맞았다.
지우도 옆에서 연신 싱글벙글하며 기남과 연주를 바라봤다.
“얘들아! 즐거운 시간 잘 보냈어? 결혼식부터 신혼여행까지 애썼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우가 큰 소리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누나! 혀엉! 아니다! 이젠... 누나! 매부! 첫날밤 재미... 있었어요?”
두 사람은 지우의 질문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인희가 서둘러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지우야! 우리 지우도 장가가보면 알게 돼. 물론 재미있었겠지. 그러니까 우리 이제 밥이나 먹자!”
인희는 두 사람의 어색함을 덜어주려고 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 기남과 연주는 더 당황스러워졌다.
둘은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 채 식당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지우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둘을 놀렸다.
“결혼한 사인데... 뭔가 이상해! 누나랑 매형!”
“지우야! 그만하고 어서 와서 엄마 거들어!”
인희가 재촉했다.
지우가 여전히 애매한 표정으로 식당 쪽으로 가자, 뒤에 남은 기남과 연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