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남은 자신의 이름을 딴 ‘NKN’으로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차렸다.
먼저 엔터테인먼트 사업 쪽에 경험이 있는 사람 몇몇을 채용한 후 신인 발굴이 급선무라 이들에게 가능성이 보이는 신인들을 섭외하기를 주문했다.
기남은 그간 박흥식과 함께 투자해 수익을 얻은 자금 외 인희에게도 회사 지분을 나눠주고 사업자금을 얻어냈다.
그 외 아버지 남두철이 굳이 자기도 지분을 나눠 갖겠다며 동업을 자청해 얼마간의 자본금을 부담했다.
그 결과 넉넉하진 않지만 궁색하지는 않게 기남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의 사업 계획을 들은 정완수와 박흥식 역시 투자자로 참가하길 원했지만, 기남은 거절했다.
먼저 박흥식은 공직에 있는 사람인지라 괜한 분쟁의 소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완수 또한 자기 사업도 바쁜데 괜한 것에 힘을 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힘을 실어주고 싶어 하는 것에는 고마움을 표하고 그는 정중히 그들의 제의를 사양했다.
사업으로 분주한 나날이 이어졌고, 이 와중에 기남은 뜻밖의 보석을 발견하게 됐는데 그 사정은 이랬다.
어느 날 모처럼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인희가 기남에게 사업 관련 이야기를 꺼냈다.
“사업 준비는 잘 돼 가고 있어?”
“네, 뭐 그럭저럭요. 그런데 좋은 노래와 가수 발견하는 게 참 쉽지 않네요.”
“그래?”
인희가 다소 걱정하는 어조로 말을 마치자, 옆에 있던 지우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 노래하는 거 좋아하는데...”
“응? 뭐라고 했니 방금?”
인희가 묻자 지우가 이번엔 아예 입을 꾹 닫고 밥 먹기를 계속했다.
그때 연주가 나섰다.
“우리 지우가 피아노 치면서 노래하는 거 몇 번 들어봤는데 꽤 괜찮던데...”
“그래 맞다! 우리 지우가 노래하는 거 나도 들었어! 정말 꽤 잘하던데.”
인희가 연주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그래? 정말 지우가 그렇게나 노래를 잘한다고?”
기남이 말을 잇자, 지우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더 열심히 밥을 퍼먹었다.
“지우야! 매형한테 왜 말 안 해? 너 가수 되고 싶어 하잖아?”
“지우가 가수 되고 싶어 한다고? 근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지금 우리 회사 얼마나 가수가 절실한데?”
연주가 재촉하고 기남이 계속 놀라움과 관심을 표하자, 지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피아노 쪽으로 몸을 옮기고는 피아노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곧 감성적인 선율이 흐르고 청량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그 위에 얹어졌다.
***
지우 오디션이 끝나고 회의실에 기남과 프로듀서, 보이스 트레이너, 매니지먼트 담당 이렇게 네 명이 모였다.
“어때요? 가능성 있어 보이나요? 내가 듣기엔 괜찮은 거 같던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저 정도면 당장 녹음해서 데뷔시켜도 승산 있습니다!”
기남의 말에 보이스 트레이너 이준호가 다소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프로듀서 정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일단 특이하고 자작곡이라는데 생전 첨 들어보는 그런 음악이었어요.”
“그 말뜻은...?”
“개성이 뚜렷하지만, 대중성도 있어 보인다는 뜻이죠.”
기남은 이번엔 매니지먼트 담당에게 눈을 돌렸다.
기남의 눈길을 의식한 최준혁이 난처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물론 음악성은 있어 보입니다. 한데 문제는...”
“...”
기남이 아무 말 없이 그저 자신을 바라보자, 최준혁이 결심한 듯 입을 뗐다.
“가수는 대중에게 보이는 직업인데 지금 입장에서는 좀 곤란할 거 같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 말씀은 응시자인 지우군이 장애가 있는 게 문제가 될 거라는 말씀인 거죠?”
“네. 그렇습니다.”
기남이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렇게 정리했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하죠. 우린 지금부터 지우를 얼굴 없는 가수로 만드는 겁니다.”
“네?”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이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지우 음악성도 뛰어나고 목소리 또한 출중한데 단 한 가지 그가 가진 장애 때문에 노래를 할 수 없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 아닐까요? 아니죠! 우리 회사 입장에서 숨은 보석을 찾았는데 포기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지우 모습 드러내지 않고 그의 노래만 소개하는 걸로 하면”
“지금까지 그런 가수는 없었습니다. 얼굴 없는 가수라니요?”
듣다 못한 최준혁이 이렇게 항변했다.
“지금까진 없었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면 됩니다. 제 생각은 이런데, 두 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기남이 나머지 두 사람 이준호와 정찬의 반응을 기다리자, 둘은 좀 난처한 표정을 짓다 그중 이준호가 먼저 입을 뗐다.
“우리가 하는 일은 철저히 대중과 엮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대표님! 다시 말해 가수란 직업 특성상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게 좀...”
기남이 이번엔 정찬의 말을 듣고 싶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역시도 같은 생각입니다. 가수란 지극히 대중적이어야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죠.”
기남이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취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대중적이라는 걸 우린 조금 다르게 해석하자는 겁니다. 일단 대중의 관심을 먼저 확인한 후 서서히 그를 드러내자는 전략인 셈이죠. 이건 그가 장애가 있어 숨기자는 이야기와는 결이 다른 겁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기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미국에 스티비 원더, 호세 펠리치아노라는 가수 아시죠? 물론 우리도 예전에 이용복이라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시청자들이 아침부터 그가 TV 화면에 나오는 걸 태클 걸어 결국 더는 활동할 수 없었죠. 반면 스티비 원더나 호세 펠리치아노는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고, 스티비 원더는 여전히 그렇죠. 차이는 바로 사람들의 인식 변화죠. 우리도 이제 그런 인식 변화를 할 때가 됐다고 전 생각합니다만.”
세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표인 기남의 말을 경청했다.
이준호가 급기야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표님 말씀 듣고 보니 우리 회사에서 새 역사를 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긴 하네요.”
“저도 뭐 완전 불가능한 이야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찬이 힘을 실어주자, 기남이 결론을 내렸다.
“물론 세 분이 이쪽 일엔 전문가시고 응시자가 실력은 좋은데 단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는 거라고 하시니 제가 아이디어를 내 봤습니다. 그럼, 일단 제가 말한 그런 컨셉으로 좀 더 다듬은 다음 데뷔시키는 걸로 하죠. 무엇보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도 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합니다!”
기남은 세 사람에게 부담을 줄까 싶어 지우가 자신의 처남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지우의 정확한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작용했다.
결론적으로 지우 실력이 출중하다는 게 검증된 이상 가족이든 아니든, 그를 배제시킬 이유를 찾지 못했던 기남은 그를 실력 있는 가수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집으로 돌아와 오디션 결과를 알리자, 인희와 연주가 흥분에 들뜬 모습을 보였다.
“전문가들도 역시 알아봤구나! 내가 들어도 웬만한 가수 빰 칠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인희가 기특한 듯 지우의 등을 문지르며 기뻐하자, 지우가 쑥스러워하며 입을 뗐다.
“내 곡 같은 건 생전 첨 들어봤대요.”
“그래? 어떻다고 했는데?”
이번엔 연주가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골똘히 생각하던 지우가 말을 이었다.
“음악성과 으음... 뭐랬더라?”
“대중성도 있다고 했지, 처남!”
이번엔 기남이 나섰다.
그리고 인희와 연주를 향해 흔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린 지우를 얼굴 없는 가수로 일단 데뷔시키기로 결정했어요!”
“얼굴 없는 가수?”
이번엔 인희, 연주 두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합창하듯 외쳤다.
“대중들의 반응부터 확인한 다음 서서히 지우를 드러내는 전략으로 가려고요, 어머니!”
“그래도 가수란 모름지기 대중들 앞에 서야 하는 직업 아닌가?”
기남의 말에 인희가 의문을 제기하자 연주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요, 어머니! 지우 같은 경우 어머니 사업 도우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는 사람은 괜찮은데 낯선 사람한텐 꽤 낯을 가리잖아요. 특히나 방송국 출연이나 그런 거 하면 조명 아래서 아주 많은 사람들 앞에 노출될 텐데 지우가 많이 불안해할 수도 있고 하니 그 편이 나을 거 같은데요?”
연주가 자기 생각을 아주 길게 공들여 밝히자, 기남은 자기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고무됐다.
해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우린 반드시 지우를 최고의 가수, 최고의 아티스트로 만들 겁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이 말에 지우, 인희, 연주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그러다 지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뒤이어 인희와 연주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날 밤 집안은 축제의 도가니로 변했고, 인희는 바쁜 손놀림으로 음식을 마련했고, 연주는 상차림을 준비했고, 기남과 지우는 축배를 들기 위해 샴페인을 구입하러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