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가 드디어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과 함께 그녀는 전공하던 경제 분야가 아닌 새롭게 복수 전공했던 교육학을 살려 시아버지 남두철이 건립한 보육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새아기가 함께 일해준다니 얼마나 반갑던지 말이다! 정말 잘 생각했다!”
“경험도 없는 저를 일하게 해 주신 아버님께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아버님!”
연주는 점점 원래 성격대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말투도 전에 비해 훨씬 사근사근해졌고, 눈빛도 생기가 넘쳤다.
해서 남두철은 며느리인 연주만 보면 싱글벙글했다.
그때 정남이 나섰다.
“윈윈인 셈이죠, 뭐! 똑똑한 며느리 덕 보시는 울 아버지, 이런 시설 가지신 시아버지 덕 본 며느리 형수님! 흐흐.”
얼마 전부터 남두철은 기남의 조언대로 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보육원과 특수학교를 오가며 지냈다.
가끔 기남 계모인 진희가 나타나 예전 버릇 못 버리고 진상짓 하는 것만 빼면 모든 게 원만했다.
정남은 이제 형수가 보육원 일을 맡았으니 어서 빨리 형네 회사로 출근할 날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심정이 깊어 갔다.
첫 출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연주가 기남에게 말했다.
“오늘 아버님께서 어찌나 반겨주시던지 말이야!”
“그랬어?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다른 말씀? 뭐?”
“아니... 어땠어? 일하기?”
기남이 화제를 돌렸다.
연주가 기남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뗐다.
“그거 말하는 건가 보네?”
기남이 긴장하며 입을 뗐다.
“응? 그게 뭔데?”
“있잖아... 그거!”
“??”
“나한테 그러시던데? 되도록 정남이 당신 회사 들어가지 않으셨음 한다고”.
기남은 한시름 놓았다.
기남은 아버지가 연주에게 아이 문제를 이야기했을까 봐 우려스러웠던 거였다.
“그러셨어?”
“응. 본인 닮아서 바람기가 많은데 예쁜 여자들 많은 데서 일하면 안 된다고.”
“그건 사실이긴 하지.”
“그럼 당신은?”
“나? 나 뭐?”
“당신은 주변에 얼굴 천사들 많은 데서 마음이 동요되지 않냐 그 소리지.”
“나야 뭐...”
“어? 왜 우물쭈물이지?“
“나한텐 당신이 있잖아.”
연주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한 번 더 찔러봤다.
“남자는 다 똑같다고 하던데... 아닌가? 내 남자는?”
“...”
“왜 대답이 없어? 어서 말해 봐! 어서!”
연주가 장난스럽게 기남에게 닦달했고, 기남은 그런 연주가 귀여워 살며시 그녀를 안아줬다.
곧이어 둘만의 밤이 시작되었다.
***
기남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에게 약하다는 점에서 아버지를 닮은 정남을 채용하기가 많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워낙 정남이 사정하며 매달리자, 그에게 한 번 기회를 주기로 맘먹고 허락했다.
정남이 드디어 기남 회사에 출근하는 첫날이 되었다.
완전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건 아니었고, 정남은 그나마 특수학교와 보육원 경력을 인정받아 대리 직급부터 시작하게 됐다.
회사에 도착해 사무실과 연습실을 둘러보던 정남의 입이 다물어질 새가 없는 걸 눈치챈 최준혁이 점잖게 말했다.
“대표님 방침이 워낙 엄격하셔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회사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 하시면 전 바로 대표님께 알리게 돼 있단 말씀요.”
대표의 동생이라 최준혁은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똑 부러지게 말했고, 정남도 흔쾌히 대답했다.
“염려 놓으세요, 최 부장님!”
그렇게 일을 시작한 정남이 기남의 예상과 달리 아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남 회사에 소속된 가수들 프로필을 일일이 점검하고 분류하는 건 물론, 가수들의 장, 단점과 보완해야 할 점도 컴퓨터에 입력하며 서서히 능력을 과시했다.
그런 정남을 보면서 기남은 안심을 넘어 감탄했다.
“최 부장님이 맡은 일을 너무 잘해 나가니 너 칭찬해 주라고 하시더라!”
기남이 말하자 정남은 기분이 좋아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흥분했다.
“그래? 와! 최 부장님 눈에 들면 다 끝난 거네! 그렇지 형?”
“어, 회사에선 형이 아니라 대표님!”
“아, 맞다! 대표님이라고 해야지. 맞죠 대표님?”
“흐흐. 그래.”
그때 최 부장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저,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저...”
최 부장이 뜸을 들이자 기남이 정남에게 말했다.
“남 대리는 좀 나갔다 다시 오지. 최 부장님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본데”.
“넵!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변해도 너무 변했다 싶을 만큼 정남은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기남은 기분이 좋아져 정남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정남이 나가고 최 부장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정찬이 우리 연습생 중 한 명을 접촉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
“아무래도 우리 회사에 데미지를 주려는 의도 같습니다. 자기 회사로 빼돌리려는 거겠죠.”
“그 연습생한테 들으신 건가요?”
“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채유라라고 이제 막 20살이 됐는데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워낙 열심히 해서 받아준 케이스입니다.”
기남이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최 부장님께 말한 거 보면 그쪽으로 갈 의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대표님께서 한번 따끔하게 정찬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됐습니다. 이 바닥이 원래 좀 그렇다고 전에 말씀하신 적 있으시잖아요. 우리 팀원이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으니 그거면 된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최 부장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더도 덜도 말고 대표님 인품이 훌륭하신 딱 그만큼만 다른 인간들이 대표님 선의를 알아줬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곈 약육강식이 판치는 정글과도 같은 곳입니다.”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글에선 괜히 힘 빼면 안 될 거 같아 그럽니다.”
“네?”
“힘을 비축해 뒀다가 정말 써야 할 그때가 되면 한꺼번에 쓰려고요. 저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대표님처럼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세상에 그리 흔치 않습니다!”
“제가 알고 보면 말이죠. 아! 이거 괜히 스스로 디스 하는 건 아닌 거 같고... 으음, 이렇게 정리하죠.”
기남이 잠시 어휘 선택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말을 이었다.
“복싱으로 치자면 전 콩콩이 스텝보단 피벗을, 잽이나 스트레이트보단 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
어느 날 기남은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면서 연주와 외식 중이었다.
모처럼 고급 레스토랑을 방문한 연주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우리 이런 데서 기분 내 보는 거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기남이 말했다.
“내가 늘 바빠서... 생각해 보니 미안하네.”
“됐어!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한 얘긴 아니니까.”
“사실이 그런데 뭐! 일한답시고 당신한테 소홀했던 게.”
“그래? 그럼, 이제부터라도 약속해 줘.”
“뭘?”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이런 근사한 데 데려와 준다고.”
“그러자! 약속할게.”
모처럼 분위기 내면서 둘은 맛난 걸 주문했다.
“근데 여기 너무 비싼 건 아닌가?”
“그럼 담엔 좀 더 저렴한 곳으로 갈까?”
기남이 이렇게 눙치자 연주가 발끈했다.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난 좋아! 당신 회사도 승승장군데 이 정도가 대순가?”
“오! 학교 다닐 때 그 모습은 완전 가식이었던 건가, 아님”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지! 난 이제 잘 나가는 기획사 대표 사모님인데 아무렴!”
연주도 기남의 농담에 맞장구를 쳤다.
“좋아! 솔직하니까 봐줬다!”
그때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점잖아 보이는 나이 지긋한 웨이터가 와인병을 들고 와 입을 열었다.
“와인은 저기 계시는 저분께서 두 분께 전하시는 겁니다.”
웨이터가 손짓하는 곳으로 기남과 연주는 눈길을 돌렸다.
그곳엔 박흥식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외식 중이었다.
기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향했다.
“형! 형도 여기 올 줄 알았으면 합석할 걸 그랬잖아!”
“아니! 됐어! 합석하면 내가 부담이 너무 커지지!”
“무슨 소리야? 내가 모처럼 형수님 뵙는 건데 계산해야지.”
“하긴 뭐! 너네 회사 요즘 아주 잘 나가긴 하더라. 흐흐.”
기남이 박흥식 아내에게 인사를 한 다음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 정말 많이 컸네! 넌 지금 한 3학년쯤 됐나?”
제일 큰 아이인 듯 보이는 아이가 냉큼 대답했다.
“네! 정확히 3학년 2학기 종반을 치닫고 있습니다!”
“어라! 똘똘하기가 아빠 저리 가라고나!”
기남이 덕담을 던지자,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배꼽인사를 했다.
“훈훈한 말씀 감사합니다!”
박흥식과 그의 와이프, 아이들 둘까지 다 키득키득 웃었다.
“우리 애가 애늙은이야! 집에서도 저런다!”
그들은 키득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기남은 순간 머릿속이 찌릿해 와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런 모습을 본 박흥식이 미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넌 적응이 안 돼 어지럽나 보다! 우린 그러려니 하는데, 자 그만 와이프한테 가 봐!”
“응. 그럴게. 그럼 형수님 식사 잘하시고 돌아가세요. 너희들도 나중에 또 보자!”
“난 괜히 분위기 깨고 싶지 않으니까 네 자리로 안 갈게. 다음에 한 번 자리 같이 만들자!"
“그래, 형!"
기남이 말을 마치고 연주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기남의 표정을 살피던 연주가 놀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이 돼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안색이 왜 그래?"
“아니... 머리가 좀 아파와서."
“갑자기? 왜?"
“나도 잘 모르겠어."
연주가 기남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음식 다 식었겠다! 다시 데워달라고 할게."
“그래."
기남이 멍한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