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온 후 기남은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기남은 일찍 집을 나섰다.
연주도 덩달아 잠을 설쳤고, 그녀는 나가는 기남을 배웅했다.
“잘될 거야! 당신이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무렴!”
끝까지 연주는 기남을 응원했다.
“나 역시 그러길 바래. 다녀올게.”
기남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성주대교로 향했다.
성주대교로 가는 도중 박흥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남아! 너 어디... 혹시 밖이야?>
<응.>
<너 기어이 거기로 가고 있구나! 맞지?>
<응.>
<넌 빠지라고 했잖아!>
<어떻게 내가 빠져. 그건 말이 안 되지.>
기남을 잘 알기에 박흥식은 마지못한 듯 할말을 이었다.
<그럼 넌 일단 경찰차 하늘색 기아 베스타만 따라 가.
꼭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알았지?>
<그러면?>
<너 뒤로 우리 차가 두 대 갈 거야.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게 돼도 그렇고, 암튼 그리 알아.>
<어. 알았어. 고마워 형!>
<또 그런 소릴! 다 끝나고 꼭 무사히 보자. 꼭!>
전화가 끊겼다.
기남은 긴장한 채 차를 계속 몰았고, 곧 성주대교 남단 근처에 도착했다.
저 멀리 한강이 보였다.
얼마 후 그 한강에 대교의 일부인 트러스가 차량과 함께 추락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잠시 후 박흥식이 말한 경찰 차량, 즉 하늘색 기아 베스타가 지나갔다.
기남은 그 차를 쫓았다.
백미러를 보니 뒤에 경찰 승합차 두 대가 더 오고 있었다.
기남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계속 운전했다.
앞서던 하늘색 기아 베스타가 뒤에 따라오던 버스를 발견했는지 속도를 늦췄다.
기남이 백미러를 보니 버스가 보였다.
기남 역시 속도를 늦췄다.
버스가 앞서자, 하늘색 기아 베스타가 버스 앞으로 빠졌고, 다시 속도를 줄였다.
뒤따라오던 버스 역시 속도를 줄였고, 그 사이 기남은 그 사이로 끼어 들으려고 했다.
그때 제법 큰 중형 세단이 잽싸게 버스 앞으로 끼어들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지 그 세단 안에는 여고생 한 명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순간 기남은 당황스러웠다.
뒤따라오던 또 다른 경찰 승합차 두 대는 버스 뒤에 붙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남은 옆 차선으로 빠졌다가 중형 세단 앞으로 끼어들었다.
그걸 본 중형 세단 운전자가 기분 나쁜지 경적까지 울리며 잽싸게 기남 차 앞으로 다시 끼어들었다.
기남은 한 번 더 앞지르기를 시도했다.
이번에도 역시 중형 세단은 기어이 기남 차를 앞질렀다.
기남은 계속 이런 식으로 소모적인 앞지르기를 할 시간이 없다는 걸 인식했다.
해서 그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중형 세단이 하늘색 기아 베스타를 따르도록 놔뒀다.
자연히 버스는 하늘색 기아 베스타와 상당한 거리가 생겼다.
잠시 후 경찰 승합차 두 대가 버스를 다시 앞질렀다.
버스는 연달아 가는 경찰차를 보곤 더욱 속도를 늦췄다.
덕분에 버스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지만, 경찰 승합차 뒤로 다른 차량이 거리를 두고 끼어들었다.
얼마 후 정확히 이전 생에서 사고가 발생한 그 지점을 달리던 하늘색 기아 베스타와 중형 세단, 기남의 차량이 트러스와 함께 졸지에 추락했다.
충격을 받은 기남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기남의 눈에 한강 위에 둥둥 떠 있는 트러스 상판 위에 자신의 차와 경찰 승합차, 중형 세단이 있는 게 보였다.
밖으로 나온 기남은 잠시 후 또 다른 경찰 승합차 한 대와 일반 차량 두 대가 한강 위로 추락하는 걸 봤다.
다행히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곧 기남은 의경들이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중형 세단을 운전한 아이들의 아버지인 듯 보이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학생과 남학생 둘을 의경이 차 안에서 꺼내고 있는 장면이 기남의 눈에 들어왔다.
***
병원에 도착한 기남은 간단한 응급처치를 받고 곧 전화기를 꺼냈다.
걱정하고 있을 연주에게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받은 연주가 전화기 너머로 소리쳤다.
<당신 어디야?>
<어, 나... 병원.>
<당신 맞지! 트러스와 같이 떨어진 차량 당신 차 맞지?>
<응.>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왜 그랬어?>
<이미 사고 날 걸 아는 내가 낫지 황당하게 다른 사람이 당하는 것보단.>
<...>
연주는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게 느껴졌다.
<연주야! 나 아무렇지도 않아. 걱정하지 말고>
<나 과부 될 뻔했잖아. 우리 아기도 유복자 될 뻔했고. 너무 한 거 아니야?>
<미안해.>
<됐고, 괜찮은 거지?>
<응.>
<집에 들어오면 그때 혼내기로 하고.. 아!~>
연주가 힘들어하는 소릴 냈다.
깜짝 놀란 기남이 소리쳤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연주야?>
<아!~ 나... 양수 터진 거 같아.>
<뭐? 당장 내가 갈게. 기다려.>
퇴원하려는 기남을 간호사가 말렸다.
“어머, 환자분! 왜 이러세요!”
“저, 빨리 가봐야 해서요. 아내가 아이를”
“안돼요! 좀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해요.”
“아니요. 저 가야 해요.”
“안 된다니까요. 잠깐만요. 여기 선생님!”
간호사가 의사를 불렀다.
마음이 급한 기남은 팔에 꽂혀있는 링거 주사기를 빼냈다.
그때 레지던트로 보이는 의사가 다가와 기남에게 말했다.
“저희는 환자분 퇴원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저 괜찮습니다. 그러니”
“절차가 있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죠. 아실만한 분이 왜”
“제가 지금 급한 상황입니다. 제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실랑이는 한참을 갔고, 결국 정완수를 통해 해결이 됐다.
그 병원은 정완수 집안에서 경영하는 대형 병원이었다.
퇴원과 함께 집으로 전화를 해봐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아 기남은 애가 탔다.
회사가 아닌 집으로 간 기남은 발만 동동 구르며 인희와 연주로부터 올 소식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인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남아! 어쩌냐?>
<왜요, 어머니?>
<연주... 아기 잃었다.>
<네?>
잠시 인희와 기남 둘 다 할 말을 잃은 듯 침묵을 유지했다.
먼저 입을 뗀 건 기남이었다.
<그 사람은 괜찮은 거예요?>
<연주는 괜찮긴 한데... 울기만 한다. 네가 와서 위로해 주려무나.>
<네. 병원 어디예요?>
연주를 본 기남은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
오히려 그런 기남을 위로한 건 연주였다.
“나 괜찮아. 아기는 또 낳으면 되지 뭐.”
기남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연주 얼굴만 쳐다봤다.
“당신 큰일 했는데 제대로 축하도 못 해주고 미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일 수도 있는데.”
“그건 아니야. 어쩐지 배가 작아도 너무 작다 했어.”
“이유가 뭐래?”
“물어보지도 않았어. 이미 죽은 아기 이유가 뭐가 중요해.”
“그래도...”
기남은 이전과 또 다른 절망감이 느껴졌다.
‘현생에서나 이생에서나 난 자식을 못 지키는 인간이 분명하군!
그런 인간이 다른 이를 구하겠다고 나서는 게 웃기는 일이지.’
혼자 자책하고 있는데 연주가 그의 눈을 뚫어질 듯 들여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나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 거 같아. 근데 말이야...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냥 우리 아기가 운이 나빴던 건 사실이지만 아주 약체로 태어나 고생하느니...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고...
암튼 우리에겐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니까 지나간 건 잊자, 여보! 응?”
오히려 연주가 기남을 달래고 있었다.
기남은 미안함을 느끼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
박흥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남아! 소식 들었다. 집에 있을 시간이라 전화 넣었다가 어머니께서 말씀 전해주셨어.
제수씨 괜찮아? 넌?>
<응. 괜찮아.>
<그래. 둘 다 아직 젊으니까.
그건 그렇고, 네가 말했던 사망자보다 훨씬 숫자가 줄어서 천만다행이다.>
<그래. 다행이지.>
<네가 충격이 큰가 보구나. 하긴... 너한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그거보다 오히려 날 위로해 주는 연주 보면서 내가 뭐 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 형.>
<그래. 이해 가. 그런데 너무 자책하지는 말아.
솔직히 나도 인생 잘 모르지만... 그냥 애기 문제는 잊어라.
그게 최선 같다, 내 생각으론.>
<묘해 기분이. 내 인생이 왜 이런가 싶기도 하고.>
<그래. 알 거 같아. 아니, 솔직히 잘 알진 못하지만, 네가 하는 말 다 이해는 간다.>
<형! 나 너무 지친다.>
<그렇겠지.>
<내 존재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세상에 단 둘. 연주하고 형뿐이라 이렇게 형한테라도 넋두리하는 거 이해해 줘.>
<당연하지 인마! 나한텐 뭐든 다 말해도 돼. 아니, 말 말고 투정질이든 뭐든 다 받아줄게. 흐.>
박흥식이 허탈하게 웃었다.
기남은 그나마 박흥식이 옆에 있다는 걸 크게 위로 삼았다.
연주에겐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난 거라고 기남은 여겼다.
몹시 스산하면서도 동시에 안온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