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1. 작년 여름
집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주유소 입구에 있는 테이크 아웃 카페에서 싸구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샀다.
7번 국도를 천천히 달리며 주변 경치를 마음껏 즐겼다. 바다를 원 없이 볼 수 있어 나는 7번 국도를 좋아한다. 가끔씩 클랙슨을 울려대는 불청객들도 있기는 하지만.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했기 때문에 점심때가 지나갈 무렵 양양에 도착했다. 마음이 싱숭하거나 먹구름을 씹지 않고 삼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나는 양양에 온다. 그래도 오늘은 생각 정리를 마친 후라 홀가분하다.
나는 특히 낙산 해변가의 소나무 방풍림을 좋아한다. 소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 아래에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 답답함이 사라진다. 보통 저녁에 마시지만 오늘은 대낮부터 맥주를 한 캔 뜯었다.
아직 피서철이나 여름 휴가철은 아니라서 해변가에 사람들은 많이 없었다. 대부분 가족 단위나 커플들이었다. 물론, 불륜 관계도 있겠지.
그런데 한 여자가 모래사장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어깨가 규칙적으로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 없는 노래들(기억조차 나지 않는다)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하늘이 연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모래사장을 두리번 거렸고,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는 데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해가 완전히 지고 손톱달이 선명하게 뜬 것을 확인한 후 캠핑용 의자와 빈 맥주캔 두 개를 챙겨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근처에 있는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그 여자가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그 여자라고 한 것은 아까 해변가의 여자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녀는 베이지색이라고 해야 할까? 개나리색보다는 조금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긴 생머리를 검은 머리끈으로 보기 좋게 묶었다
그녀는 저녁을 차려주겠다고 했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서 저녁을 먹으며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양에는 처음인지(이번이 다섯 번째라고 답했다), 왜 하필 양양인지(나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얼마나 머무르는지(2박을 할 것이라고 답했다)로 시작해 일 이야기, 가족 이야기, 연애사까지. 돌이켜보면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가끔 필요할 때 짧게 호응만 해주었다. 그러다 누군가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갑자기 대화가 끊기고,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침묵을 깨려는 듯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키가 180은 넘어 보이는 누가 봐도 훤칠한 외모의 젊은 남자였다. 그녀는 저녁을 준비하러 주방으로 갔고, 나는 갑자기 노곤해져 짧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뻗었다.
중간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 잠에서 깼는데 고요한 새벽 적막 속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들릴 듯 말 듯 한 희미한 소리였고, 파도 소리와 풀벌레 소리와 섞였지만 확실히 그것은 여자의 신음 소리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고,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두어 번 좌우로 강하게 흔들고는 화장실에 다녀와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호기심이 피로를 이기지 못했다.
뜨거운 햇살과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오전 7시를 가리켰고, 온 세상은 이미 환해져 있었다. 나는 방에서 나와 어제의 평상에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일출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때 내 방 옆 옆방 문이 열렸고, 그녀가 어제처럼 긴 생머리를 묶으며 나왔다. 역시 어제와 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녀는 어깨 옆으로 흘러내린 속옷 끈(검은색으로 기억한다)을 똑바로 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나는 속이 좋지 않아 식사는 사양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부탁했다.
그녀가 커피를 가져다주었고, 잠시 후 아까 여자가 나온 방 문이 열리더니 어제의 그 젊은 남자가 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젊은 남자도 전혀 놀란 기색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뭔가 우쭐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 또한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왠지 어색해서 얼른 커피를 비우고, 숙소를 나왔다.
나는 차를 몰고 양양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매번 양양에 올 때면 들르는 곳들이지만 늘 새롭고, 반갑다. 마지막으로는 낙산사에 들려 기도도 했다(내용은 알려줄 수 없다).
해가 질 때쯤 숙소 앞에 주차를 하고 내리는데 저 멀리 해변가 끝에 경찰차와 구급차가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곳으로 걸어갔다. 웬 남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 젊은 남자였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녀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나는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저녁을 차려주었고, 나는 말없이 그것을 먹었다. 그녀도 오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제 보니 그녀는 정말 미인이었다. 너무 진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쌍꺼풀에 오똑한 콧날, 약간 얇은 듯한 섹시한 입술까지. 얼굴도 갸름하고, 몸매도 늘씬하니 피부까지 하얘서 어떤 옷도 잘 소화할 것 같았다.
그때 두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며 숙소로 들어왔다. 둘 다 취해 있었다. 나는 막 식사를 끝내고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있었고, 두 친구 중 한 사람은 많이 취했는지 곧바로 내 옆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셋이서 맥주를 마셨다.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다른 것은 잘 기억나지 않고,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은 기억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한 번의 기회는 얻어요. 그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에요.'
나는 순간 전 날의 잠자리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싶었다. 남자는 눈이 반쯤 풀려 있었고,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에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니 심장이 멎는 듯했다. 심장이 요란스럽게 두근거렸고, 그녀의 흰색 꽃무늬 원피스 안으로 검은색 속옷이 희미하게 비쳤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어제만큼이나 예쁜 손톱달이었다. 그리고 남은 맥주를 비우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누워있는데 한동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둘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잠깐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깐의 고요함이 우리를 둘러쌌고, 나는 금방 잠들었다.
깊은 잠을 잔 탓일까? 새벽에 일찍 잠이 깨어 낙산사에 올라가 일출을 보고 내려왔다(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방파제 근처에 경찰차와 구급차가 있었다. 이번에는 웬 남자가 방파제에서 실족사 했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급차 근처를 기웃거렸다. 어제 나와 술을 마시던 남자였다. 먼저 방에 들어갔던 친구는 경찰차 앞에서 경찰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겁지겁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노크를 하고 방문을 다 열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점심때까지 커피를 몇 잔 마시며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짐을 챙겼고 숙소를 빠져나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2 올해 여름
그러고 보니 작년 여름이었다. 솔직히 까맣게 잊고 살았다. 이틀에 걸친 의문스러운 죽음이었지만 타인의 고통에는 이렇게 무감각한 법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이후 현실에서 겪은 업무 스트레스나 인간관계들로 인한 감정 소모에 비하면 그 사건은 소소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스트레스가 쌓여 양양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니 작년의 그 일이 기억난 것이다.
숙소 근처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작년과 달라진 것은 없다. 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허리가 약간 꼬부랑한 전형적인 동네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누구슈?'
'여기, 이제 운영 안 하나요?'
'뭔 소리여?'
'작년에 제가 여기서 2박을 했었는데..'
'아니,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여? 여기는 사고 나고 빈 집 된 지가 벌써 언젠디'
'네? 사고요?'
그 할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집에는 시부모님과 젊은 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강도가 들어 남편이 먼저 죽고, 그 소리에 깬 시아버지까지 죽였다고 한다. 젊은 여자는 살려달라고 빌었고, 강도는 기회를 준다며 자신과의 잠자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강도는 여자를 무참히 짓밟았고(원래는 더 적나라한 표현이었는데 차마 그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밤새도록 몇 번이나 짓밟혔다고 한다), 시신을 태워버리고 약속대로 여자는 살려둔 채 달아났다고 한다. 강도는 며칠 뒤 근처 해변에서 발견되었지만 여자는 그 이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매일 해변에 앉아 하루 종일 울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 이 집은 폐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가 띵했다. 그럼 내가 본 것이 귀신이라는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작년에 내가 머물렀던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방을 둘러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맥주 몇 캔을 마시고, 그녀를 떠올렸다. 눈물이 흐르다 멈추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다 취기가 올라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을까? 얼굴에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져 잠에서 깼다. 이미 세상은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 지냈나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내 얼굴과 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옷과 속옷을 벗었고, 나체가 되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몸은 실루엣만 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어서 천천히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녀의 따뜻한 살결이 느껴졌다. 그녀의 혀가 내 온몸을 쓰다듬어 주었고, 잠시 후 그녀가 가진 따뜻함과 촉촉함이 느껴졌다.
나는 하염없이 울었던 것 같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3. 에필로그
한 남자가 디지털카메라로 집 내부와 방을 마구 찍어댄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는 미간을 찡그린 채 일기장을 천천히 넘겨보고 있다. 사진을 찍던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결과물을 확인하고는, 먼저 차에 올라탔다. 일기장을 보던 남자는 곧 무심한 듯 일기장을 덮어 버리고, 바닥에 있던 배낭에 일기장을 툭 던져놓고, 근처에 있던 빈 맥주 캔을 주워 함께 가방에 쑤셔 넣은 후 한 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 남자가 마당과 주방을 살펴보던 세 사람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하자 그들도 대문을 빠져나가 차에 올라탔다. 남자는 마당과 집 전체를 한 번 더 쓱 둘러보고는 대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담을 따라 잠깐 걷다가 왼쪽에 골목 입구가 나오자 걸음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 후 골목 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70~80대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정면을 주시한 채 아무런 말 없이 가방을 그녀에게 건넸고, 여자는 느릿느릿 허리를 접어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이 희미해져 갈 때쯤 남자는 담배꽁초를 땅에 툭 던지고는 차로 향했다.
골목 안 어느 집 대문이 삐거덕 하고 열린다. 어둠보다 더 까만색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마당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있다. 나이 든 여자가 가방을 건네주자 젊은 여자는 그것을 모닥불 한가운데로 툭 던져버렸다. 두 여자는 한동안이나 모닥불과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