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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큰누나 Aug 17. 2022

예쁘게 봐주세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은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특별히 다친 것도 없는데 걸을 때 발이 자꾸 아팠다. 오래 서 있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30여년 동안 정형외과를 자주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사진 찍어볼게요, 뼈는 이상 없습니다, 물리치료 하세요, 평발이라 어쩔 수 없어요 같은 코스를 밟아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본격적인 병원 순례에 들어갔다. 동네에서 실력 있는 병원부터 히말라야도 올랐다는 대장님이 홍보하는 병원까지 여러 군데를 다니며 치료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신발도 크고 편한 것 위주로 신어야 했다. 원래 꾸미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데다 평발인으로서 굽 높은 구두는 언감생심이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닥 어려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결혼식 등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자리에서는 무척 곤란했다. 볼이 넓은 운동화는 투박했고, 그런 신발에 맞춰 입을 수 있는 정장이 많지 않았다. 결국 큰 운동화를 신고 그 신발에 그럭저럭 어울리는 바지를 입고 간 나에게 결혼하는 선배가 한 마디 했다. “너는 언니 결혼식 날 이렇게 입고 왔니!” 사람들의 눈이 다 내 신발과 바지에 쏠리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앞면에 I♥NY 이라고 크게 써진 티셔츠처럼, '발이 아파서 운동화를 신었어요' 라고 적힌 티셔츠라도 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말이 상처가 되어 이후로는 결혼식에 참석하기가 망설여졌고 이런저런 핑계로 둘러대며 축의금만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이었다. 3번 문제 발표해 볼 사람? 하니 여러 아이가 손을 들었다. 그 중에 평소에 발표를 잘 하지 않던 아이가 있길래 얼른 발표를 시켰다. 아이는 일어나서 나를 보며 물었다. “3번 문제요?” 아니, 3번 문제 발표해 볼 사람 할 때 자기가 손 들어 놓고는 3번이냐고 왜 물어 보는 거야?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며 3번 맞으니 발표하라고 퉁을 놓았다. 어딜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 치고는 제법 발표를 잘 했지만 그래도 집중을 잘 하라는 잔소리를 한번 더 덧붙였다.


  이어서 글쓰기 공책 검사를 하는데 또다시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글쓰기 방법에 대해 설명하며 예시로 준 글을 한 아이가 그대로 베껴 써 온 것이다. 아니, 지난 주에도 하나도 안 해서 오늘 해 오기로 해 놓고는 베껴 왔단 말이야? 베낀 것은 무효로 하고 두 편을 새로 쓰고 가라는데 아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시간을 끈다고 봐 주지 않을 거라는 으름장을 놓으며 기싸움을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제가 아직 혼자 글자를 못 써서 여기서는 이거 못 해요.” 2학년이 되고도 몇 달이 지난 때였으니 글자를 못 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코로나 때문에 거의 등교를 하지 못하면서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엄마나 형이 글자를 알려 주는데 너무 바빠서 도와줄 시간이 없었다며, 그래서 고민하다가 한 편은 예시를 보고 그대로 썼는데 나머지 한 편은 못 쓴 채로 그냥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투박한 신발을 신고 선배의 핀잔에 주눅 들었던 내 모습이 다시 떠오르며, 숙제를 안 한 것은 그저 게으름과 무성의함 때문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이 부끄러웠다. 



  그동안 걱정이 많이 되었겠다고, 선생님이 앞으로 잘 알려 주겠다고 하며 아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문득 아까 3번 문제요? 라고 물어본 아이도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표를 해 보고 싶은데 야무지게 하지는 못하겠고, 그래도 손은 들었는데 막상 하려니 너무 긴장됐던 건 아닐까? 그래서 질문을 하며 잠깐 시간도 벌고, 용기도 내고, 혹시나 엉뚱한 답을 말할 걱정도 줄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가 딴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인데 내가 혼자서 너무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이에게 굳이 다시 물어보진 않았다. 아니어도 뭐 어떤가? 집중하라는 타박 대신 격려와 응원의 눈빛으로 바라봐줄 수 있으니 계속 오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알고 보려고 노력하면 세상이 훨씬 더 예쁘게 보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남들에게 일일이 설명하진 못해도 각자의 사정을 보듬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선생님이라면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 부족하고 서툰 아이들을 예쁘게 봐주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 말과 행동에 숨겨진 마음을 알고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면 나의 부족하고 별난 면도 좀 더 많이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서로 서로 예쁘게 봐 주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생각하니 참 다정하고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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