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밤, 땅바닥에 엎드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난 12월 어느 토요일 저녁에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나는 집에 가려고 길을 건너다가 크게 넘어졌다. 멀쩡히 걸어가던 사람이 바닥에 일 자로 엎어져 있으니 운전자들도 많이 놀랐겠지만 양쪽 차선에서 정차하던 차들이 비추는 전조등에 나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밤새 발목은 무릎만하게 부어올랐고, 다음 날 병원에서는 발목 인대가 많이도 끊어졌다고 했다. 도대체 평지를 걷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소견과 함께 반깁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꼼짝 없이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에 회사와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아저씨가 생각났다. ‘아저씨한테도 말씀 드려야 하는데. 왜 안 보이나 궁금해 하실 텐데…’
그 아저씨의 정체는 내가 출퇴근하는 버스를 운행하는 기사님이다. 나이는 아마도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 내 삼촌뻘 정도 되신다. 나는 출근할 때 집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며칠에 한 번씩은 아저씨 버스를 타게 된다. 아저씨는 승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맞이하시고는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 방송을 하신다. 날씨 이야기, 승객들에 대한 안부 이야기, 새로운 도로가 뚫려서 차가 덜 막히는 이야기일 때도 있다. 사람 많은 2층 버스에서 비어 있는 자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알려 주시고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안전운전 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으신다. 정신없이 자다 보면 아저씨의 목소리가 승객들을 깨운다. “벌써 KCC정류장에 다 왔네요. 2층에서 내려오실 때 위험합니다. 정류소에 완전히 정차하고 충분히 시간 드릴 테니 그때 천천히 내려와 주세요. 카드 태그 잊지 마시구요.” 아저씨가 방송 말미에 늘 하시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라는 말이 나는 정말 좋았다. 평소엔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저씨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정말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아저씨가 좋은 하루의 시작을 이미 만들어 주시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그 다정한 말을 마음에 담아 일터로 갔고 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하루 되라는 인사를 많이 건네게 되었다.
아저씨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한결같은 분이었다.안정적인 운전 실력도, 승객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라디오 같은 방송을 듣는 소소한 재미도 매일 변함없었다. 가끔은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넷 하며 천천히 내려오십시오.” 하는 멘트에 속으로 ‘아, 아저씨!’ 탄식할 때도 있긴 했지만, 반복되고 피곤한 출퇴근길을 편안하게 책임져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마음에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나도 밤늦은 퇴근길에 아빠 생각하며 산 단팥빵을 나누어 드리거나, 버스회사 게시판에 아저씨가 승객들에게 얼마나 잘 해 주시는지 글을 남기기도 하며 감사함을 표현했다.
아저씨의 버스를 탄 지 일 년이 좀 넘었을 때, 직장을 옮기게 되어 평소와는 다른 정류장에서 내리는 첫날이었다. 아저씨 뒷자리에 앉아서 휴대폰에 푹 빠져 있는 나에게 아저씨가 조심스레 말을 거셨다. “저.. 여기.. 여기 내리잖아요?” 고개를 들고 보니 내가 평소에 내리던 정류장이었다. 아저씨가 보니 내려야 할 나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데 하필 내릴 사람도, 탈 사람도 없어서 곤란해 하시다가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제서야 왜 이렇게 버스가 정류소를 거북이 걸음으로 통과하는지 깨달으면서 대답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회사 옮겨서 이제는 양재역에서 내려요!” 승객들에게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셨기에 할 수 있는 말씀이었다. 그 뒤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아저씨와 인사도 하고 근황 이야기도 짧게 한다. 버스를 타지 않을 때라도 근처에 아저씨 버스가 지나가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그럴 땐 더욱 든든한 이웃 삼촌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은 하차태그를 하려다가 카드를 착각해서 엉뚱한 카드를 찍었다는 사람이 있었다. 아저씨는 그럼 돈이 두 번 나간다며 손님 얼굴을 알고 기억해 둘 테니 다음번에 탈 때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그 사람이 감사하다고 내리고 난 후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저도 승객으로 버스를 타 보면 불편하고 위험할 때가 눈에 보여요. 내가 막 뛰어가면서 기사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출발해 버리면 얼마나 야속한지... 그래서 기사일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런 어려움들을 조금이라도 줄여 드리려고 노력을 해요. 그렇게 상대편 입장이 되어보면 배려가 어렵지만은 않더라고요. 아, 그리고 보통 아저씨들은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잖아요. 근데 버스 청소 하다가 삑 소리가 나서 보면 내가 궁둥이로 카드를 찍을 때도 있다니깐요? 그럼 얼마나 아까운지 아이고..”
아저씨의 친절은 매뉴얼을 훨씬 뛰어넘는 아저씨의 성품 덕분이었다.
승객들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운행하시기 때문에 달갑지 않은 출근길도 다닐 만하게 느껴지는 것이고, 다들 반갑고 안심하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는 것이다. 어떤 직업이든 그 직업의 품격을 높이는 사람이 있다더니 아저씨가 바로 그런 어른이셨다. 직장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런 태도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존경스러웠고, 그런 아저씨의 버스를 타는 것이 감사했다. 아저씨께 인생을 살아가는 소중한 태도를 배운 날이었다.
겨울이 많이 지날 동안 다행히 나도 많이 회복했다. 다음 주부터는 천천히 걸어서 출근을 한다. 아저씨를 다시 만나 웃으면서 카드를 찍을 순간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내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리며 일하고, 아저씨의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좋~은 하루를 계속 만들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