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국종 May 08. 2020

‘부자’라는 단어가 주는 위화감

공포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

['부자'라는 단어가 주는 위화감]

부자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불편함 같은 것이 있다. 이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부유함에 대한 힐난이나, 가지지 못한 자로서의 원망, 청빈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명확하지 않은 이 감정을 조금 구체화해 보자면 정확히는 '부자' 자체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 '우리는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위화감이다.


주식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고 지금도 우리는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그건 우리는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다. 이 대화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웃긴 이유는 아직 우리 중 그 누구도 '부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고작 [삼성전자] 몇 주를 사고 당연히 부자가 될 것이라는 가정을 하며, 그러면 '우리는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논하는 앞서가도 한참을 앞서간 고민의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마치 어린아이들이 모여 '공수래공수거'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과 비슷한 기분임을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우리 역시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은 매우 웃기고, 이 대화는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꽤 즐거운 대화 주제이다.
(궁금하다면 모두 삼성전자를 1주씩 사고 모여서 이런 이야기를 해보기를 권한다)


독일의 문화철학자이자 돈에 관한 깊은 탐구를 했던 게오르그 짐멜은(실제로 맑스 베버는 짐 멜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상당한 연구비를 지원했다.) 자신의 저서 <돈의 철학>(정확히는 화폐에 가깝다.)에서 돈의 많은 특징을 밝힌다.-예를 들어 돈이 가진 속성의 대표적 특성으로는 '관계성'과 '자아실현'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관계성은 결국 돈을 지불하는 사람과 돈을 받는 사람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자아실현'의 특성은 결국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돈을 받은 사람에게 특정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 이룬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결과물인 '전문성'은 이런 교환행위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그래서 짐 멜은 돈을 '타자기'에 비유한다. 한 사람이 어떤 글을 쓴다고 할 때 펜과 타자기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 속도와 양의 차이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처럼 돈은 우리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아주 좋은 도구이다. (물론 이 1,000p에 달하는 책에는 화폐의 많은 단점을 통해 만능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돈은 좋은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는 왜 '부자'라는 말에 위화감을 느낄까? 그건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도구가 '공포'이기 때문이다.-많은 사람이 이제 무언가를 새로운 분야에 관심이 생기면 포털을 이용하기보다 유튜브를 이용해 검색한다. 나 역시 유튜브를 통해 '주식', '제태크' 등에 관해 많은 것들을 검색하고 찾아보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그리고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그들은 어김없이 '가난'이 얼마나 끔찍한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야기한다. 즉 우리가 부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난이 주는 공포를 피하기 위함이다.-이러한 논리는 무언가 더 나음을 추구하거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행동하게 하기보다 어떤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움츠리고 모든 것을 경계하게 만든다.-내가 이러한 논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시어도어 젤딘의 영향이 크지만 사실 우리 대다수는 '돈'을 분리하면 이러한 논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부모가 자녀와 함께 길을 가다 미화원을 보고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했다면 어떨까? 이 예시가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는 한때 우리는 이런 논리가 얼마나 악한 논리인지 느껴왔고 이 논리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예시는 구체적인 어떤 대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추상적인 대상 역시 가난한 사람은 '고통스럽다'라는 프레임을 만드는 논리가 된다)-그리고 나에게 이 논리는 '부자'라는 상태가 그렇지 않음에도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나는 우리가 모두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되면 안 돼."가 아닌 우리 자신 각자가 추구하는 '무언가'를 위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재택근무를 포기하고 코로나 뉴스를 보지 않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