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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종 May 12. 2020

과학의 시대에 후설과 하이데거를 읽는다는 것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하여

1.

한동안 안면마비로 한의원을 다녔다. 사실 여전히 후유증이 남아 신경외과를 방문해 봐야 하나 고민이지만 가끔 을 제외하고는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종종 잠을 설치는 날은 여지없이 왼쪽 눈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한의원을 가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한의원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천막 너머 옆 환자들의 진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야식으로 떡볶이를 먹고 배탈이나 떡볶이를 먹지 않겠다는 학생의 이야기,

운송업을 하다 무리를 해서 어깨가 올라가지 않는 청년의 이야기,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잘 못 자는 아주머니 이야기

부모로서 버텨내야 한다는 압박에 요즘 부쩍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아저씨의 이야기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하루에 한 번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듣게 된다.

그러면 어김없이 의사는 묻는다. "왜 울고 그러세요?"

그러면 어김없이 환자는 답한다. "선생님이 알아주셔서 고맙나 봐요."


예전에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얼마 전 애니어그램 자격증 있는 분한테 성격검사를 받았는데 받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분명 전에 친구가 나한테 해주었던 이야기랑 똑같은 이야기인데 전문가라니까 괜히 그런 거 있잖아요. 친구 이야기는 그냥 내 걱정에 해주는 이야기 같았는데 전문가 이야기라 '아 진짜 그렇구나' 하는 그런 거, 그래서 괜히 위로가 되더라고요."



2.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거대한 스승과 위대한 제자가 있었다.

스승의 이름은 후설이고, 제자의 이름은 하이데거다.

에드문트 후설(좌측), 마르틴 하이데거(우측)

현대철학을 공부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두 거인이 있다.

플라톤처럼 느끼게 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느끼게 되는 마르틴 하이데거다.


그런 하이데거의 스승이자 현상학의 창시자. 장 폴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시몬 드 보부아르 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 화이트 헤드, 러셀, 폴 틸리히와 함께 당대를 호령하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의 말을 빌리면 "과학은 21세기의 제사장이다." 한 과학자에 따르면 한국인의 '3 신'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불신, 과신, 맹신'이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과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외국에서 과학 분야 발표에 대한 신뢰도가 50% 미만인데 비해 한국에서 과학 분야 발표에 대한 신뢰도는 90%에 육박하는 것을 보면 마냥 틀린 이야기도 아닌듯하다.)


오늘날 과학은 과거의 종교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다.


이러한 과학의 시대에 '후설'과 '하이데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후설 철학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 중 한 가지가 '과학'이다. 후설은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을 '과학'과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기존 철학의 방식을 부정하고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철학이 단지 '그럴듯한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을 넘어 실제적인 영향을 나타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뇌과학, 자기 계발서 책에서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주변 친구들은 이런 책을 볼 때마다 철학이 과학으로 증명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며 나에게 사진을 찍어 보낸다.


하이데거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이데거의 철학적 특징은 '존재의 의미' 더 줄여 '의미'다. 과학을 통한 연구, 실험, 발견, 발명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왜' 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말한다. "과학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갈지라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3.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는 왜 후설을, 하이데거를 마주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과학을 탐구하고, 철학을 연구하는가?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해서다."


오늘날 과학적 근거와 이유 없이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같은 책에 대하여 솔직한 이야기로 새로운 이야기는 전혀 들어있지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인류학자, 철학자들이 한 이야기들의 짜깁기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럼에도 그의 책이 의미 있는 이유는, 새로운 인식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유발 하라리는 '추측'하지 않는다. '의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관찰'하고 '추론'한다. 과학적 방법을 통해 그동안의 인류를 다시 새롭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설득'력(力)' 다시 말해 우리를 설득하는 힘을 갖는다.


오늘날 철학은 기술, 과학, 빅데이터 등 끝없이 펼쳐진 수의 향연에 의미를 부여한다. 매트릭스에서 1과 0으로 이루어진 모니터를 보고도 그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이미지를 발견하고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본다. 이처럼 철학은 우리의 삶을 둘러싼 현장의 현상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4.

긴 이야기를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한의원에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은 왜 다른 곳도 아니고 그곳에서 그렇게 울었을까?

그 친구는 왜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친구가 아니라 애니어그램 전문가의 말에 위로를 얻었을까?


자신의 몸이 힘든 상태임을 인정해준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준 사람이 '과학'으로 대표되는 한 분야의 전문가인 '의사'였기 때문이다. 나의 힘듦이, 나의 고통이 그저 푸념 섞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고통 중에 있음을 증명하고 확인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열심히 살았구나', '나 진짜 힘들었구나', '나 잘 살았구나'

라는 의미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나에게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열심히 살았죠?
안면마비가 원래 열심히 사는 사람한테 찾아오는 병이에요."



과학의 시대에 후설과 하이데거를 읽는다는 것


나와 타자를 발견하고,

나와 타자를 이해하고,

나와 타자를 설득함으로,

나와 타자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의 행간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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