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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wpw Nov 07. 2019

입김의 계절

겨울

새벽 운동을 하는 날의 출근길은 무척 정신이 또렷하다. 아침부터 땀을 흘린 탓인지 몸도 좀 가벼운 느낌이고. 맨투맨이나 후드티만 입어도 추운 줄 몰랐던 계절이 어느덧 끝나가는지, 코트를 입어도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정도 추운 날씨가 만원철과 광역버스를 타야 하는 내게는 딱 좋다고 생각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숨을 훅, 내쉬자 하얀 입김이 눈 앞에 천천히 퍼진다. 올해엔 어쩐지 계절이 다가오는 것이 매번 갑작스럽다. 한 번 더, 이번엔 따뜻한 입김을 불듯이 하- 하고 숨을 내쉰다. 방금 막 양치를 한 탓인지 민트향이 살짝 코끝을 스친다. 칫솔질을 할 때면 매워서 눈물이 찔끔할 정도의 치약답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겨울에 어울릴 하얀 입김이 둥실둥실 하늘로 퍼진다.




입김을 뱉는 것은 나도 모르던 습관이다. 예전에 같이 걷던 사람이 옆에서 가만히 보고는, 입김을 후, 하, 후, 하 하고 불면서 다닌다고 웃었던 일이 떠오른다. 애기냐고 귀여워하면서도 다 큰 사람이 그러는 게 꼭 보기 좋은 일은 아니었는지 종종 또 그런다 또 하고 핀잔을 주고는 했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이 듣기 좋아 추운 날에는 꼭 후, 하, 후, 하 하며 입김을 뱉곤 했다.




옛 생각이 뭉클뭉클 떠오르는 것이 꼭 입김을 닮았다 싶었다. 후, 하고. 하, 하고. 뭉게뭉게 퍼져나가다 금세 희미해지며 풍경에 스며든다. 입김이 스러지듯이 기억도 스러진다. 느린 걸음 사이로 부러 뱉던 입김 대신 입술을 앙다문다. 입김을 뱉는 일이 습관이 아니었다고, 문득 깨닫고야 만다. 옅게 늘어진 입꼬리로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한시 바쁜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걷다 보면, 계절의 향기도, 온도도, 색깔도 뒤늦게 알아채곤 한다. 봄에는 꽃향기와 포근한 공기가, 여름에는 쨍한 햇볕과 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가을에는 은행 냄새와 겨드랑일 간지럽히는 바람이, 겨울에는 하얀 입김과 시린 하늘이 있다. 갑작스러운 계절도, 불쑥 생각나는 기억도 이제 나쁘지도 무섭지도 않다. 김장을 담근 장독대를 땅 속에 묻어 둔 것처럼, 가라앉아 가는 것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 그래도 쓰고, 맵고, 시고, 짜고, 달았던 기억들 중 몇 가지는 추억으로 떠다니고 오늘처럼 우연히 또 떠오를지도 모른다.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계절이 반갑듯이, 때때로 불쑥 생각나는 추억들도 하나 둘 반가워지는 일이 썩 나쁘지 않다. 울렁이는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어디에도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기억력이 좀 좋은 탓에 일상이 덜 심심하면 좋지 뭐. 하며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역사 안에는 사람들의 온기 탓인지 후, 하 하고 불어도 입김은 나오지 않고, 가파른 계단 탓에 가쁜 숨만 꿀렁꿀렁 삼키며 인파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더 이상 습관처럼 불지 않는 입김에도, 겨울은 제자리를 찾아왔고 덜컹이는 차창 너머에는 아직 미련이 남은 가을의 햇살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조금 더 추워지면, 꼭 호두과자를 사 먹겠다는 다짐을 했다. 뒤늦은 봄이 와도 아쉽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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