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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면지언니 Mar 07. 2021

몸꼴, 우리가 만난 세상

공항 밖으로 나오니, 습기가 가득한 푹푹 찌는 여름이었다. 한국은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던 즈음이어서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다. 알지 못하는 언어들이 가득한 그 곳에서 도심으로 가는 차를 기다렸다. 우리는 태국에 도착했다. 사전 답사를 위해 이미 왔다 갔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한 달여를 머무를 작정을 하고 도착하니 어쩐지 낯선 풍경이 가득한 이곳이 더 궁금해졌다. 주태국한국문화원에서 마련해준 차를 타고 다른 사람들은 휴양을 위해 찾는다는 콘도미니엄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첫날의 야식은 세븐일레븐에서 사온 태국식 볶음밥. 아직도 그 날 맛봤던 인스턴트식의 첫 맛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몸꼴은 태국의 비플로어라는 극단과 함께 작업을 하기 위해 2015년 가을 방콕에 머물렀다. 방콕의 지상철을 타면 나나역, 아속역을 지나 통로역까지 두 정거장,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비플로어의 스튜디오가 우리의 주둔지였다. 제법 낯선 곳에 도착한 우리는 비플로어의 구성원들을 만나 함께 창작하고, 대화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꽤 긴 시간을 머무른다는 생각에 관광에 대한 집착도 없었던 터라 오롯이 작업에 파묻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루의 일정은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각자 혹은 함께 밥을 먹고, 느릿느릿 스튜디오로 향했다. 가는 길에 태국의 화려한 과일들을 한 봉지 사들고 가기도 하고, 얇은 비닐에 무심하게 담아주는 아이스커피를 사 마시기도 했다. 평범한 삶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거리를 지나 한참을 걷다보면 반가운 건물이 나왔다.


스튜디오에 도착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풀고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가 창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 주제에 대한 생각을 태국어와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서로의 창작 방식을 교환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워크숍이 끝나면 대게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노점에 자리를 잡고 맥주와 함께 이것저것을 먹었다. 한 달이나 머물렀는데도 여전히 그 음식들에 대해 이것저것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맛보았던 음식들이 너무나 다양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뜨거운 화로에 올려진 요리를 먹으며 더위에 맞불을 놓기도 했고, 설명을 들어도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도 맛보며 온 힘을 다해 감각을 확장했다. 
 

2015년 주태국한국문화원과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던 한-태 교류사업의 일환이었다. 몸꼴과 비플로어는 공동창작 워크숍을 진행하고, 창작의 과정과 결과를 작품으로 제작하여 쇼케이스 공연을 올렸다. 이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국제교류 사업 등을 통해 재원을 조성하여 3년 간 사업을 이어갔으며, 공공예술기금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는 방콕에서도 마지막 해에는 기업과 기관에서 다양한 재원 조성과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종종 시장이나 슈퍼에 들러서 장을 봤다.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과일이나 요리들을 하나씩 사먹어 보거나, 태국 현지의 식재료로 한국식 요리를 하기 위한 궁리에 몰두했다. 일과의 끝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숙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현지의 문화 속에 들어가 보겠다며 작정했던 이도 있었고,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다른 환경과 삶의 패턴 속에서 모든 것은 우리의 사고에 개입하거나 이내 창작으로 연결되었다. 어느새 이곳은 낯선 이국땅이 아니라, 나의 친구들이 사는 동네, 내 동네가 되었다.


우리는 이내 친구를 사귀었다. 매일 출석하듯 방문했던 노점의 사장님과도 친구가 되었고, 어느 골목에 가면 저렴하지만 최고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마사지 가게가 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비플로어의 친구들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어 방콕의 구석구석을 함께 누볐다.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커뮤니티 정원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어디인지, 신선한 해산물을 먹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게 되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한 곳에 머무르며 깊이 있게 누군가를 만나는 경험은 서울이 아닌 방콕이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한국에서는 왜 이런 몰입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까?’, ‘우리에게 이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태국에 있는 시간 동안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유럽이나 미국 대륙에 비해 거리가 가까운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곳을 잘 알지 못했다. 방콕에 머무르며, 이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었고, 감춰진 것이 아님에도 굳이 배우려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작업을 핑계로 마주했다. 우리는 위태로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태국과 한국의 이야기들은 참 많이 닮아 있어서, 몸꼴과 비플로어는 서로를 방패삼아 이전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발설할 수 있었다. 검열과 맹신, 무기력한 저항과 불복종의 이야기들이 태국에서의 작업 <Something Missing>에 담겼다.

긴 호흡으로 작업을 하게 되리라 예상하지 않고 시작했던 첫 만남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비플로어의 막내 배우가 인사를 전하며 울먹거릴 정도로 모든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 눈물이 무색하게도, 만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2017년까지 매년 한 달 여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창작과 공연을 이어갈 수 있었고, 몸꼴과 비플로어는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에 익숙해질 만큼이나 친밀한 동료가 되었다.


몸꼴과 비플로어의 공동창작 작품 <Something Missing>은 방콕의 통로아트스페이스와 방콕아트앤컬처럴센터, 서울의 콘텐츠문화광장 등에서 3년 간 여러 관객들을 만났다. 2015년 방콕시어터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무대미술상을 수상했다.


국제교류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새삼 되새김질을 하게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몸꼴의 해외 작업은 태국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2007년 선보였던 작품 <구도(Ku-do)>는 네덜란드의 극단 호모루덴스와 협업으로 창작되어 한국과 네덜란드에서 투어 공연을 했고,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리어카 뒤집어지다(Handcart, Overturned)>는 일본, 프랑스, 스페인, 부르키나파소에서 공연을 올렸다. 이후에는 작품 <충동(Impulse)>이 2019년 대만과 포르투갈에서 관객들을 만났고, 이어 스페인과 영국의 축제를 찾을 예정이다. 태국에서의 작업이 인연이 되어 일본의 스토어하우스가 주최하는 ‘신체극 페스티벌’에서 신작 <뭍으로 나온 오리_배>를 선보이기도 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창작의 공간과 무대에서의 언어들은 서로 닮아 있었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우리의 작업들은 우리의 공용어가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을 방문하여 창작과 공연으로 또 다른 세상에 말 걸기를 하는 것은 늘 새로운 시도였다. 우리를 환대하며 맞이해주었던 스태프들의 얼굴과, 공연장에서 만났던 관객들,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했던 동료 예술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새로운 공기를 마시며, 전에는 모르던 곳에 머물렀던 모든 경험들은 몸꼴의 긴 여행의 소중한 페이지들이다. 


여전히 떠나고 싶다. 해외 공연을 한다는 경험을 훌쩍 넘어서, 알지 못하던 곳들을 알아가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작업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고 싶다. 생경한 환경에 놓이기를 자처하며 여전히 또 다른 세상들을 마주하고, 그 마주침으로부터 또 다른 작업들을 시작하고 싶다. 몸꼴에게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다. 


몸꼴의 지난 여정에는 여러 작품들이 있었고, 수많은 곳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다. 감히 우리가 세상을 만났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세계 곳곳을 스치며 만났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몸꼴을 만나주었던 세상에 새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며, 곧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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