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는 언제 인사를 하게 될까

인사의 UX로 본 사회적 거리ㅡ 쉬운 인사, 그리고 어려운 인사

by LINEA
인사(人事).

[명사]
① 마주 대하거나 헤어질 때 예를 표함. 또는 그런 말이나 행동.
②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서로 이름을 통하여 자기를 소개함.
③ 입은 은혜를 갚거나 치하할 일 따위에 대하여 예의를 차림.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엘리베이터와 경비실 사이


사전은 인사를 '예의'라고 정의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복잡한 것 같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어색하고, 경비실을 지나갈 자연스럽게 인사가 나온다.

같은 나인데, 상황에 따라 행동이 다르다.


아파트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나는 말없이 서 있는 편이다.

괜히 휴대폰을 보거나, 앞쪽에 달린 화면을 보며 시선을 피한다.


3.png 언제 1층에 도착하나...


그런데 1층에 내려 경비실을 지나거나,

청소하시는 분을 보면 자연스레 인사가 나온다.

심지어 내가 사는 단지가 아니어도 그렇다.


처음엔 내가 소심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성격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경비원이나 청소하시는 분은 '이 공간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이에 기대되는 역할이 있다. 인사를 주고받을 이유가 생긴다.


하지만 이웃은 다르다.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애매하다는 마음에, 인사도 머뭇거려진다.


그런데 앞집 어르신과는 인사가 자연스럽다.

몇 번 마주치며 교류가 있었고, 서로의 생활 리듬도 대충 안다.

이미 최소한의 관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연결만 있어도, 인사는 어색하지 않다.


생각해 보니 나름의 패턴이 있었다.

역할이 명확하거나

몇 번 마주쳐 익숙해지거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을 때


그럴 때 인사가 나왔다.

반대로 관계가 애매하거나 반응이 불확실하면 인사를 건네기 힘들었다.

인사가 좋다는 걸 알아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의지만으로는 어렵다.


아이와 함께 탄 엘리베이터


아이를 키우면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아침에 아이와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건다.

"몇 살이에요?" "어린이집 가요?"

아이가 웅얼웅얼 대답하면, "귀여워!" "잘 다녀와!"

같은 한마디에 분위기가 편하게 흘러간다.


아이가 우리를 연결해 줬다.

언제부턴가 나도 아이 뒤에서 함께 인사를 하기도 했다.


2.png 아이와 함께 있으면 세상이 따뜻하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낯선 사람 사이에 이유를 만들어줬다.

아이가 있는 순간, 관계의 명분이 생긴다.

이유가 있어야 인사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아이는 ‘사회적 윤활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남역에서의 낯선 인사


예전에 강남역 횡단보도에서 어떤 외국인이 내게 말을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안녕?”

뒤에 바로 이어졌다.
“너 목에 건 거 멋지네, 영화 일 하니?” (사원증을 보고 한 말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역삼역까지 대화를 하며 걸었다.
별다른 목적도, 맥락도 없었다. 그냥 말이 오갔다.


1.png How's it going?


낯선 사람이 말을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언어 때문이었을까, 사회적 거리가 잠시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냥 반가워서 인사했어요”라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관계가 생겨야 인사를 하지만, 그들은 인사를 하며 관계를 만든다.

그래서 한국에서 누군가 먼저 말을 걸면

‘도를 아십니까’가 떠오르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인사가 친근감보다 의도로 들리는 사회.
우리는 친근해지는 것보다, 오해받는 게 더 두렵다.


우리는 이유가 있어야 말을 걸고,
그들은 이유를 만들기 위해 말을 건다.
말이 먼저냐, 관계가 먼저냐의 차이. 차이 하나가 사회의 공기를 바꾼다.




인사는 친절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찾는 방식이다.


나는 그래서 말보다 목례를 택한다.

고개를 숙이는 행동 하나로 당신을 알아봤습니다라는 신호를 보낸다.


상대가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나의 방식으로 존중을 표현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회는 모르는 사람끼리도 인사가 자연스럽다.

그렇지 않더라도, 조금씩 시도해 볼 순 있다.

다들 마음은 따뜻한데,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인사를 더 잘하고 싶다. 그게 말이든, 목례든, 잠깐의 눈 마주침이든 —

서로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신호가 오가는 사회면 좋겠다.





『일상의 UX 실험실』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고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사람과 제품, 시스템이 만드는 ‘좋은 경험’을 다각도로 탐구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계산하지 않고 나가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