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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하지 않고 나가는 사람들

무인점포 UX에서 본 설계의 빈틈

by LINEA


어느 날 무인점포에 들어갔을 때였다.

오랜만에 갔더니 계산대 옆에 눈에 띄는 몇 가지 안내 쪽지가 더 생겨 있었다.


IMG_9754.jpg 어메이징..


아니, 이걸 굳이 써붙여야 할 정도로 어른들이 계산을 안 하고 나간다고?

아이도 아니고, 교육받지 못한 시대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럴까?


행동경제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작은 확률의 손해(잡힐 위험)’를 과소평가하고 ‘즉시 얻는 이득(공짜)’을 과대평가한다.

합리적으로는 전혀 이득이 아닌데도, 순간의 유혹이 더 크게 작동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도덕성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구조적인 아쉬움도 있었다.



사람들이 왜 계산을 안 할까?


무인점포의 경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손님은 물건을 고른다 → 계산대에 선다 → 바코드를 찍고 카드를 갖다 대거나 꽂는다 → 출구로 나간다


키오스크를 들여다보니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결제 완료 여부가 시각/청각적으로 명확히 표시되지 않는다.

출구는 열려 있어, 계산 완료 여부를 확인하지 않아도 밖으로 갈 수 있다.

점원이 없어 확인 압박도 없다.

영수증 출력은 마지막 단계라, 이용자가 놓치기 쉽다.


즉, 계산 안 하고 가져갈 수도 있는 구조가 존재한다.

고객의 양심과 확인에 맡겨진 시스템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UX 다크패턴의 역설


원래 다크패턴은 ‘사람이 의도치 않게 잘못된 행동을 하게 만드는 디자인’을 뜻한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자동으로 유료 구독이 결제되거나, 탈퇴 버튼이 꽁꽁 숨겨져 있는 것처럼.


무인점포도 비슷하다. 출구는 열려 있고, 결제 완료는 불명확하며, 사회적 압박은 사라져 있다.
결과적으로 “계산 안 하고 그냥 나가도 되는 UX”가 만들어져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크패턴이 된 셈이다.


경고문은 왜 무력한가


점주 입장에서 답답하니 안내 메모를 붙인다.

“계산 안 하면 절도죄로 처벌됩니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역효과를 낸다.
사람들에게 여기선 계산 안 하고 나가는 사람이 많습니다라는 사실을 광고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아, 그런 방법이 있구나’라는 불필요한 학습을 했다;;)


경고보다 중요한 건 경험 설계


결제 완료 시 문이 열리게 하거나, LED와 소리로 명확한 피드백을 주거나,

계산대 옆 화면에 본인이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 등이 있다.


감시의 눈 효과(watching-eye effect)연구에선, 눈 그림만 붙여도 사람들이 정직·협력적으로 행동하는 비율이 올라갔다. 영국 사무실 커피함 실험에서 눈 그림을 붙이자 기부율이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물론 반대 연구도 있어 만능은 아니지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건 여러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도둑을 막는 법”은 훈계가 아니라, UX 설계다.


일상에서의 사례

생각해보면 이런 사례는 무인점포만이 아니다.


횡단보도: 신호는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 기다림이 ‘예측 가능한 시간’이 아니라 ‘지루함’으로만 남을 때, 사람들은 빨간불을 무시하고 길을 건너기도 한다. 불가피한 조건 위에서도, 경험은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점차 개선이 되는 중인 것 같아 다행)

결혼식: 상황에 따라 식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건 모두가 안다. 하지만 하객이 30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마음에 남는 건 축하가 아니라 피로다. 절대 시간은 못 줄이더라도, 시간을 어떻게 흘려보내게 할지는 UX의 영역이다.

야구장: 구조상 화장실은 멀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중의 경험은 즐거움이 아니라 ‘경기의 중요한 순간을 놓칠까 봐 불안해하는 감정’으로 각인된다. “어쩔 수 없다” 는 말은 UX에서 불완전한 답이다.


모두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흘려보낼지”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 설계다.


결론: 도둑을 만든 건 사람만이 아니다


무인점포에서 물건을 훔쳐 나가는 건 분명 잘못이다.

하지만 행동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UX라는 렌즈로 보면, 이것은 ‘도둑을 만들어버린 UX’의 문제다.


아마존의 무인점포는 계산이 끝나야 출구가 열리고, 결제 완료가 되면 화면과 소리로 확실히 알려준다.

작은 경험 설계의 차이가 도둑을 막고, 신뢰를 지키고, 점주의 자필 쪽지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이거다.

사람이 무너지는 건 성향 때문이 아니라, 구조를 어떻게 만들두었느냐의 문제다.

UX를 통해 누구나 좋은 쪽으로 흘러가도록 설계해야 한다.





『일상의 UX 실험실』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고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사람과 제품, 시스템이 만드는 ‘좋은 경험’을 다각도로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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