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가능성이 무너질 때 UX는 실패한다
종점에 멈춰 있던 버스를 탔다.
버스에 문이 열린 상태였으니, 여러 명의 승객이 이미 탑승해 있었다.
기사가 언제 오는지 별도의 안내도 없으니 ‘곧 출발하겠지’ 하고 모두가 생각했을 것이다.
10분이 지날 때부터 승객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비가 오는 후덥덥한 날씨에 에어컨도 꺼져 있었다. 답답한 차량 안에서 시간은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었다.
“왜 안 가지?”
불편한 감정이 승객 사이에서 오가기 시작했고, 5분이 더 지나자 버스 안은 혼돈의 카오스로 변했다.
“배차 간격이 몇 분이야 도대체?”
“버스회사 전화번호 어디 있지?"
기약 없는 기다림이 짜증으로 바뀌는 장면이었다.
불만의 진짜 원인
상황을 조금 멀리서 보면, 버스회사가 법을 어겼거나, 기사가 게으른 것이 아니다.
한국의 시내버스는 기차처럼 정시 출발형 시스템이 아니라, 배차 간격 유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종점에서 일부러 시간을 맞추기도 하고, 기사 교대나 휴식 때문에 잠시 차를 비워두는 경우도 있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규칙 제44조의 6에는 휴식시간이 정해져 있다.
2시간 이상 운행 → 운행 종료 후 15분 이상 휴식
4시간 이상 운행 → 운행 종료 후 30분 이상 휴식
기사 부재는 법이 보장한 휴식 시간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 “몇 시 출발합니다”라는 안내가 없었다는 것.
사람들은 지연 자체보다, 돌아오는 시간을 모른다는 사실에 더 크게 화를 낸다.
똑같이 15분을 기다렸더라도, "17시 15분 출발 예정"이라는 안내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불안은 납득으로, 분노는 기다림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에어컨이라도 켜놨으면 이 정도로 아우성대진 않았을지도...)
법적 의무와 승객의 경험
버스회사 입장에서는 규정을 지켰다.
기사에게는 의무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배차 간격을 맞추는 게 시스템상 우선이다.
그러나 승객 경험은 최악이었다. 규정으론 문제가 없지만, UX 실패였다.
기사님이 돌아오자, 승객들은 각자의 사정을 들이밀며 목소리를 높였다.
누군가는 “병원 예약 늦었다”라고 화를 내고,
또 다른 사람은 “저번에 승객 무시하고 가버리더니 00번이 문제야”라 했다.
기사님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한 사람은 시청에 신고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정보 부재 → 불확실성 → 분노 확산 → 집단 소동의 흐름이었다.
가격과 기대의 차이
생각해 보면 1,350원짜리, 그것도 준(準) 공공서비스인 시내버스에 우리가 큰 기대를 한 건지도 모른다.
시내버스는 원래 정확성과 친절보다, 싼 요금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시스템에 가깝다.
반대로 1만 5천 원(혹은 그 이상)하는 공항리무진은 다르다.
리무진버스는 더 넓은 좌석, 충분한 짐칸, 서비스 요소(친절함, 와이파이, 전원 콘센트 등)를 제공함으로써 정시성·쾌적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많다. 요금은 단순 이동비용이 아니라 경험의 일부로 작동한다.
기다림의 UX
기다림을 겪는 사용자의 경험 핵심은 예상 가능성이다.
실제 지연보다 인지된 지연(perceived delay)이 불만을 더 크게 만든다는 연구가 있다.
엘리베이터가 늦게 오는 불만을 줄이기 위해 거울을 설치했더니, 기다림이 지루함에서 자기 점검 시간으로 바뀌었다는 사례가 유명하다.
대중교통도 마찬가지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정류장에 기본 편의시설이 없을 경우 승객들은 실제 대기 시간보다 최소 1.3배 이상 더 오래 기다린다고 느낀다. 똑같이 10분을 기다려도 ‘15분 이상’으로 체감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울의 경우 소비자 중심형 버스정보시스템(BIS/BIT) 도입 후, 불규칙성 관련 민원 건수가 75%에서 25% 수준으로 감소했다는 통계가 있다.
즉, 정보 제공만으로도 불편과 분노가 줄어든 것이다.
개인 기사에게 친절을 강요할 순 없다.
약속된 간격을 지켜 운전해야 하는 점, 교대 스트레스 속에서 모든 걸 감당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스템은 보완이 가능하다. 작은 배려 하나가 불필요한 민원과 혼돈을 막을 수 있다.
출발 예정 시각 안내: 전광판, 붙이는 안내판 등 어디든 표시해 둔다.
냉방 유지: 기사 부재중에도 (날씨에 따라) 기본 냉방을 가동해 둔다.
정보 투명성: 교대·대기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지한다.
버스가 안 가는 동안,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사람들은 지연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화를 낸다.
엘리베이터의 거울, 공항의 지연 안내, 버스의 전광판.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한다.
UX의 본질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다.
1,350원짜리 버스에서 겪은 이 작은 소동은 결국, 안내 한 줄이 만들어내는 UX의 힘을 보여줬다.
안내한 줄, 에어컨 가동. 사소한 장치가 혼돈을 질서로 바꾼다.
『일상의 UX 실험실』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고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사람과 제품, 시스템이 만드는 ‘좋은 경험’을 다각도로 탐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