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존밀크 Jul 21. 2024

오랜만에 집밥을 차렸다

배 부른데 항상 배고픈 느낌 혹시 아시나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은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너무 배고파서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이래저래 혜원과 비슷한 삶을 살아왔던 나는 저 말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공감한다.

일하다가 혹은 공부하다가 허기지니까 이것저것 입 안으로 쑤셔 넣는데 내 오장육부는 오히려 텅 비어 가는 느낌. 근데 배는 쑥쑥 나오기만 하니 너무나 억울할 뿐이고.



영화 말미의 혜원은 잠시 서울로 떠나며 내 고향에 아주심기를 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난 오히려 반대다. 잠시 고향에 머물며 타지에 아주심기를 해버렸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난 이 타지에 살면서 종종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런 허기에 시달릴 때마다, 내 엄지 손가락은 아주 자연스럽게 ‘배달의 민족’ 앱을 누른다. 내 배민 등급은 단순한 Vip가 아니라 무려 천생연분이다. 이 등급을 처음 본다고? 그럼 당신은 매우 건강한 삶을 살고 계시는 겁니다. 이 등급은 배민 주문을 한 달에 20번 이상 해야 받을 수 있는 등급이거든요.



이렇게 배달의 민족과 나는 천생연분이지만 그들은 이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했다. 오히려 먹으면 먹을수록 내 몸과 마음은 구멍이 숭숭 나는 기분.

이 모든 게 배민 탓인 걸까? 그건 아니다. 모두 내 탓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우울증이 심화된 탓이다.



남편과 떨어져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모든 요리활동을 중단했다. 어차피 내 뱃속만 채우면 되는데 뭐 하러 재료를 손질하고 불 앞에서 지지고 볶고 있나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스레인지를 한 달 이상 켜지 않으면 화구에 불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 지경이 되어도 나는 집에서 라면 한 그릇 끓여 먹지 않았다.




어느 순간 집을 바라보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그동안 시켜 먹은 배달용기가 거실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고 집안에는 내 허락을 받지 않은 벌레 세입자가 여럿 거주 중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우리 집 쪽으로 걸어가기만 해도 묘한 냄새가 난다. 이 쯤되면 우리 옆집으로 치킨 한 마리 시켜드려야 하는 부분이다.



이런 나의 기행은 영국에서 남편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싹 없어졌다.

이곳에서 나에 대해 새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와 함께 나눠 먹으며 수다 떠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만든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이런저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 뱃속은 배부르다 못해 뻥 터질 지경이 된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홀로 돌아왔을 때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집을 다시 쓰레기소굴로 만들지 않을까란 부분이었다. 심지어 남편은 나에게 집에 cctv를 설치하자는 말까지 했다.

처음 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최선을 다해 이 집의 컨디션을 지켰다. 요리 역시 마켓컬리의 각종 밀키트를 열심히 ‘조리’하는 정도로 나의 허기를 달랬다.

하지만 그 순간은 매우 찰나였다.



여름이 점점 깊어지면서 나의 무기력증은 심화되기 시작했다. 소진, 내 모든 게 다 소진되어 버렸다. 그나마 챙겨 먹는 우울증 약이 내 뇌를 불행하지 않다고 속여주지만 내 몸이 느끼는 곤궁함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나는 또 날 먹이는 것과 내 집을 가꾸는 것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살던 어느 주말,

나는 격한 허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무의식적으로 배민 앱을 눌렀지만 시간이 이른지라 배달해 주는 가게가 없다.

그리고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이 배고픔은 배달의 민족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는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이 먹고 싶다. 갓 끓인 된장찌개에 파가 들어간 계란말이를 밥과 함께 야무지게 먹고 싶다. 소박하다 못해 조촐하지만 이것들이 내 뱃속을 매우 든든하게 만들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엉망진창 주방으로 가서 날 위한 요리를 준비했다. 솔직히 말이 요리지, 조리에 가까운 날 위한 밥상.



언제 끓였는지 모르겠는 청국장. 다행히 이걸 먹고 죽진 않았다.
내 몸은 파 넣은 계란말이를 원했지만 파가 없어서 그냥 계란부침




밥까지 새 밥을 했다면 정말 완벽했겠지만 아직 나에겐 그만큼의 기력은 없다. 국 하나에 찬 두 개인 정말 조촐한 밥상이지만 이 밥을 먹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 고기 한 점 없지만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마치 불도장을 내 안으로 집어넣는 기분이다.

다 먹고 나니 정말 오랜만에 ‘배부르다’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배가 부르고 나니 어느 정도 기운이 난다. 기운이 나니 엉망진창인 집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의 목표는 바닥에 있는 각종 쓰레기를 치우고 싱크대에 있는 그릇들을 싹 설거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서도 기운이 난다면 빨래를 하고, 주름진 옷들을 빳빳하게 펴주고 싶다.



너무 덥고 습기가 가득 차서 숨 한 번 쉬기 힘든 여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늘한 가을이 오고 뼛속까지 시린 겨울이 올 것이다.

내 마음의 그늘과 습함도 시간이 지나면 밝아지고 뽀송해졌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만약 오뎅꼬치 세 개만 살 수 있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