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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준희 May 04. 2021

짧아진 우리의 하루

사랑은 죽음을 두렵게 만든다



 시간 내어 전주에 내려왔으나  86세 할아버지와 30세 손녀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여과 없이 짧아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점점 불규칙적으로 흘러가고 있어 우리의 활동 시간이 갈수록 엇갈리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기도를 다녀오신 후 다시 잠드셨다가 8시쯤 아침을 드시고, 신문과 뉴스를 보시다 점심을 드신 다음에 낮잠을 주무신다. 그 뒤부터는 운동을 가서 이것저것 하시다가 이른 저녁을 드시고  방전된 상태로 소파 위에서 누적된 피로를 푸신다. 한 집에서 온종일 붙어있었음에도 결국 할아버지와 내 활동이 겹치는 시간은 불과 6시간 남짓한 것이다. 과일을 먹으면서도, 드라마를 보다 대화를 하던 중에도 할아버지는 그 사이를 비집고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할머니가 취미로 활동하시는 노래교실에서 해마다 두 번 봄가을로 가곡제를 여는데, 어쩐지 이번에도 운 좋게 시간이 됐다. 저번에도 봄이었던 것 같은데, 작년 봄에는 아뿔싸 싶었지만 이번에는 두 번째로 참석하게 된 사실이 이상하게 행운처럼 다가왔다. 지금 두 분을 뵙고 오면 조금이라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지, 짐 쌀 생각을 하면서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혹여나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할아버지는 엄마와 통화를 하던 와중에도 꽃 같은 건 본인께서 준비하셨으니 몸만 내려오라고 하셨고, 나는 여전히 가벼운 내 두 손이 부끄럽기만 해 이번에는 또 무엇을 들고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할아버지의 찬장에 있던 오래된 인스턴트 원두커피가 떠올랐고 그 자리에서 바로 원두를 주문했다. 그렇게 염치 불고하고 나는 가벼운 두 손에 주문해둔 인스턴트 스틱 원두와 손편지를 들고 전주행 만석 버스에 올랐다.



       저녁 8시 50분 차를 탔으나 주말에 근로자의 날까지 겹쳐 오전 12시쯤 뒤늦게 도착한 터미널에 택시는 없고 길게 늘어선 줄에서 횡설수설하는 사람들만이 보였다. 비까지 와 한껏 축축하고 으슬으슬한 새벽, 우리는 벌벌 떨며 카카오 택시와 콜택시를 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침 할아버지께 전화가 와 엄마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할아버지는 댁에서 걸어서 오면 1시간가량이나 되는 터미널까지 홀로 오시겠다 성화셨다. 간신히 할아버지를 말리며 40분간 떨던 중 카카오 택시가 잡혔고 10분쯤 지났을까, 할아버지 댁 단지 앞에 내리던 순간 손전등을 들고 우릴 향해 걸어오시는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택시를 못 잡았는데 할아버지의 걱정을 덜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하셨는지 할아버지는 그 길로 곧장 우리를 데리러 나오신 참인 것 같았다. 새벽까지 주무시지 않고 삼계탕을 끓이며 기다리셨던 할아버지는 그 새벽에 우유를 데워주시겠다며 추운 곳에서 덜덜 떨었을 우리를 걱정하셨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할아버지는 국물이 졸면 다시 물을 넣고 졸이고 또 물을 넣고 졸이기를 반복해 끓이시던 삼계탕을 먹자고 하셨고 엄마와 나는 할아버지의 큰 뜻을 소심하게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옻닭이라니. 감히 시도해 보지도 못한 메뉴였지만, 면역력이 떨어질 때면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일어나곤 하는 엄마와 나는 뒷일을 감당하기 어렵게 될까 봐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할아버지가 사 오신 두 마리의 옻닭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이 드셨고 할머니는 이틀째 그것을 먹고 있다며 너희들은 할아버지가 먹으라고 강요 안 해서 좋겠다.라고 장난스레 말씀하시면서 할아버지가 발라주시는 살코기를 꾸역꾸역 넘기셨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도착한 신춘 가곡제 객석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드문드문 그분들의 자녀들이 앉아계셨고 나는 자연스레 그곳에서 가장 어린 손녀로 자리해 있었다. 연로하신 사회자 분이 그간 올랐던 무대와 달리 제법 커진 이번 무대에 압도된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 노인들끼리의 축제니 부담 갖지 말고 즐기자는 말씀으로 가곡제의 막을 여셨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나 외에는 전부 어르신들뿐이었다. 코로나니 뭐니 혼란스러운 시국 탓에 대부분의 자녀분들이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리라 생각하며 괜스레 민망함을 덜어내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장에서 응원하는 손녀가 나뿐인 것에서 되레 신나기도 했다.



       첫 번째 무대에 오른 할아버지 한 분이 노래를 시작하시다 가사를 잊으셔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고 요청하셨다. 객석에 앉아 계시던 분들이 하나 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그 덕인지 그분은 차츰 안정된 모습을 보이셨다. 자타공인 음치 셨음에도 끝까지 용기 있게 무대를 즐기시던 그분을 보며 힘껏 박수를 보내드리고 나니 곧바로 우리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무대에서 한 번도 떤 적 없으신 할머니는 예상과 달리 떨다가 가사를 깜빡 잊으셨고 나는 덩달아 긴장하던 와중에 그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 영상을 찍으면서도 할머니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본인 역시 놀라셨는지 객석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무대 위가 너무 춥더라, 덜덜 떨려서 가사가 하나도 눈에 안 들어 오더라 라는 말을 반복하셨다. 내 손을 잡고도 여전히 떨고 계시는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아 드리던 중 이번 가곡제가 할머니의 마지막 무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속상했다.



       막상 무대에 오르니 반짝이는 하늘색 드레스를 선택한 것이 부끄러우셨던 건지 드레스를 만지작 거리시던 할머니, 차례로 무대에 오르신 멋쟁이 부부, 한복을 곱게 입고 진달래꽃을 부르시던 할머니,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의지하며 다니시다 무대에 오르기 전 놀랍게도 걷기 시작하신 어르신 등. 각자의 사정을 안고 무대에 오르신 분들이 저마다의 인생 곡을 부르셨다. 누군가 단합을 요하지 않았음에도 무대에 오른 어르신들이 실수를 할 때마다 관객석에서는 힘찬 박수와 응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잦은 실수로 횡설수설하고 어설퍼서 외려 감동이 짙은 어르신들의 축제에서 감히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은, 무대에 설 때나 무대 아래 있을 때나 관계없이 모두 하나가 되던 그 순간이다. 그렇게 다른 어르신들의 무대까지 끝나갈 무렵, 할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해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할아버지가 또 고개를 푹 숙인 채 졸고 계셨다. 문득 시작 전 할머니에게 귓속말을 하시다 할머니가 그 말을 못 듣고 되물으시는 것이 답답하셨는지, 할머니에게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셨던 친구 분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 친구도 죽었다고!


      그간 함께하셨던 분들이 지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신 게 못내 아쉬우셨는지, 그곳에서 유일하게 남은 할머니 친구 분이 다른 분의 임종 소식을 전하려 조심스레 운을 떼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엄마가 무대에서 입을 의상을 골라 드리던 와중에도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제 주인공도 아닌 걸 뭐, 화려하게 입으면 부끄럽기만 해. 언젠가부터 눈썹을 짝짝이로 그리셔서 엄마의 애정 어린 핀잔을 듣게 되신 할머니. 할머니는 언제나 그 삶의 주인공이셨는데, 언제부터 주인공 자리를 다른 이에게 내주셨던 걸까. 문득 당차고 멋있는 여성으로 살아가심에 만족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두 분이 행여 조급하게 떠나실까 겁난다. 당장의 내일이 불안한 와중에도 내 걱정보다 더 앞서는 건, 조부모의 건강이다.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어른, 제일 의지하는 어른은 언제나 두 분이셨기에 나는 '전주'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가장 익숙한 분들이 그곳에 더 이상 안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생각보다 일찍 다가올까 봐 종종 두렵다.



      낯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솔직한 말로 어린 날에는 억울할 때가 많았다. 무언가를 돌려받기 위해 마음을 다하는 건 아니었으나 장녀로서 또 큰 손녀로서 다른 이들보다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다고 여겼던 지난날들을 세어보며 불평하기도 했고, 온전히 스스로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할 시기임에도 누군가를 챙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우습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더군다나 그런 생각이 잦아질 때면 나는 언제쯤에나 내 눈앞의 것들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 있을지, 이러다 남들보다 훨씬 뒤처지는 삶을 살면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불분명한 내 시간들이 그저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 한탄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언젠가 다 네 복이 될 거야. 라며 불확실한 미래의 어느 지점에는 반드시 내 몫의 복을 돌려받을 거라 위로하나, 나는 무엇을 돌려받기 위해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 말은 내게 온전한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저 글을 쓴다는 핑계삼아 소재가 될만한 날들을 함께하며 사랑하는 이들 곁에 좀 더 자주, 더 오래 있을 수 있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 두 분을 뵙고 올 때면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이렇게 마음이 뭉글한 것이, 마냥 부끄러워진다.



        엄마를 도와 부족한 손으로 할머니의 생신상을 차려 드렸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죽기 싫다, 너희들이 와서 아주 행복한 생일이었다고 반복해 말씀하셨고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먼 걸음 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담백하게 기쁨을 표현하셨다. 헤어져야 하는 서운함을 한껏 드러내시던 할머니는 내게 큰 그릇이 될 인물이라 오래 걸리는 거라며 기도하고 있으니 염려 말라셨고, 그 귀여운 위로가 바람에 그치지 않게 약속드리고자 하이파이브를 해드렸다. 또 올게요 할머니. 내의 차림으로 현관까지 마중 나오신 후 엘리베이터 앞에서 연신 손을 흔드시던 두 분의 모습이 이번에도 꽤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할아버지 책상 위에 커피 원두와 함께 동봉한 편지를 올려두었다. 드시는 알약 목록, 병원 검진 날짜, 날짜별 혈압 수치 등 철저하게 정리된 노트들이 얹어있는 할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우리 가족 생일 리스트가 상세히도 적혀있었다. 할아버지의 카톡은 이번 달 내 생일에도 어김없이 가족들에게 날아갈 예정이다. 매우 부담스럽고 창피하게.

장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큰 손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우리 가족 모두 00 이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냅시다(하트).



       두 분을 뵈러 가는 길에는 무엇을 들고 가든 받은 사랑에 비할 것들이 없어 두 손이 가볍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할 때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분명 내가 두 분의 귀하디 귀한 손녀고 글을 써낼 때는 특히 내 두 손이 얼마나 더 귀한지 민망할 정도로 세세히 설명해주실 것이기에 그런 생각은 삼가기로 했다. 두 분과의 시간이 더 벌어지기 전에 미래에 국한된 장차의 뜻을 되도록 현실로 만들어 드리고 싶다. 그간에도 건강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편지에 썼듯 찬란한 순간을 기다리지 않고, 그 찬란한 순간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투박하게나마 이렇게 저렇게 손가락을 풀어 본다.






할아버지 댁 베란다에 만개한 꽃.(이번 방문에는 꽃 이름 찾는 어플을 알려 드렸는데, 집에 돌아 온 후 내가 그 이름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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