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배우다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고
어떤 엄마의 일기장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을 본 적 있다. "평생 짝사랑할 사람이 생겼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제는 배워야 할 때인가 보다. 볼수록 좋고 정이 든다. 애기 얼굴에서 나를 본다. 나의 분신.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할까."
몇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재래시장에서 내 손을 잡고 걷다가 어떤 옷가게 앞에 멈춰서 이 옷 저 옷 내 몸에 대보던 얼굴. 예뻐죽겠다는 말을 이마에 써붙이고 헤벌쭉 웃던 표정이었다.
급성 바이러스로 온몸에 물집이 퍼진 내 몸을 씻기며 울던 모습. 그냥 바이러스 탓이었는데도 나한테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기억난다. 흉터가 남은 채로 등교한 첫날 친구들 놀림에 못이겨 조퇴한다고 울먹인 전화에 직장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달래주던 손길도.
문구점에서 볼펜을 훔쳤다가 파출소에까지 잡혀갔던 날 데리고 나오면서도 용돈을 충분히 못줘 미안하다는 말부터 나오던 입. 1000원짜리 볼펜을 문구점엔 수십만원으로 보상했으면서도 내 잘못을 짚어내진 않았다. 그저 용돈이 부족하면 꼭 얘기하라고 당부한 게 다였다.
수년 동안 취업에 실패하다 마침내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 날 부둥켜안고 아이처럼 뛰던 발. 하고 싶었던 일이니 맘껏 해보되 힘들면 언제든 관둬도 된다며 으쓱인 어깨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런 기억들이 나를 만들었다. 아무리 해도 안된다며 좌절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훌쩍 웃어넘기는 기질을, 눈앞에 문제가 닥쳐와도 일단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다고 반사적으로 생각해버리는 성격을 만들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성과보다는 일상을 들여다보는 성향도 만들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걸까,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그래도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효과가 혹시 이런 건 아닐까.
'사랑은 위험한 부작용을 낳지 않고도 영향을 미치며 변화시키는 방법'이고 '사랑은 인내를 전제로 한다. 내적 노력을, 무엇보다 용기를 전제로 한다'는 말에 또 한번 이런 장면들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내가 평생 보아온 그 인내와 용기가 결국엔 사랑일 것이다. 물론 어떤 엄마의 일기처럼 확실히 짝사랑 쪽일테지만. 내가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 건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은 여러 번 되뇌어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참 어려운 주제다. 드라마, 영화, 노래, 심지어 게임에서까지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을 깨우치긴 쉽지 않다.
와중에 감사하게도 나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온 생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을 만났다. 내가 남은 생을 다 바쳐 고마워해도 부족할만큼 고마운 그 사람이 얼마 전 63번째 생일을 맞았다.
평일이라, 저녁 미팅도 있고, 주말엔 약속이 있어서, 여러 이유를 대고 찾아가지 않았다. 서운할 만도 할텐데 오늘도 잠깐 찍힌 내 부재중 전화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며 다정하게 날 부르는 목소리에서 사랑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