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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Oct 15. 2022

고시원 26~32일차

그리고 스타트업 4일차

스타트업 4일차

1. 고시원 생활이 많이 익숙해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알람을 몇 개씩 맞춰놓으니 일어나진다. 알람이 너무 시끄럽다고 주의를 받기도 했다. 그래도 몸이 시간에 적응해간다.


2. 그릇과 포크를 샀다. 굳이 포크를 산 이유는 밥도 주워 먹을 수 있고, 라면 먹을 때도 사용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쓰기가 애매하다. 방에서 그릇을 가지고 주방에 가서 음식을 꺼내 먹고, 다시 그릇을 닦아 방에 가져다 두는 건 꽤 귀찮다. 과정 자체가 귀찮기도 하고 물기가 있는 그릇을 방에 두는 것도 싫다. 주방에 가서 공용 그릇과 식기로 먹고 거기서 먹고 닦고 두고 오면 편하다.


그래서 샀는데 웬만하면 공용 그릇을 이용하고 있다. 너무 설거지가 안 되어있어서 더러운 날이면 내 그릇을 사용하긴 하지만.

3. 물기가 남아있는 건 물 뺄 곳이 필요한데, 다 쓴 마스크를 바닥에 깔고 물기 빼는 용도로 사용한다. 사진으로 찍을까 하다가 민망해 멈췄다.


4. 모기가 많이 사라졌다. 물론 여전히 많지만 적어도 최근에는 자면서 모기를 본 적이 없다. 모기는 옷에 붙어온다고 해서 방에 들어오기 전에 몸을 한 번 털고 왔던 게 도움이 됐나.


5.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투자가 진행되고 있고, 매출도 발생하는 거 같다.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업무에 기여하지는 않고 있지만 기대된다.


6. 없는 것도 많다. 아침에 청소해주시는 분이나, 커피머신도 없고 사무용품 등도 많이 부족하다. 그래도 매일매일 뭔가 생겨나는 걸 보면 신기하다. 어제는 정수기 옆에 티백이 생겼다. 사무용품도 매일 뭔가 사는 듯하다.


7. 연봉이 꽤 줄었다. 성과급이나 복지비용 등을 생각하면 거의 20%는 줄었다. 그래도 여기서 내가 뭔가 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1억을 벌 때 20%가 줄었다면 타격이 크겠지만 뭐 그 정도 벌었던 위치가 아니니까.


8. 대표님은 자리도 없고 개인 컴퓨터도 없이 맥북으로 일한다. 그날그날 다른 자리에서 일한다. 나에겐 고정 자리와 듀얼 모니터까지 주셨다. 저번에 말하는 걸 보니 어떤 외주를 받으면 00만 원 받는다고 그거 하고 구성원들에게 맛있는 거 사주자는 고민까지 하신 거 같다.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이렇게 구성원들을 신경 쓰는 사람이니 일단 믿고 따르고자 한다.

9. 유행을 많이 타는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니치 향수 브랜드나, 인센스를 켜놓는 사무실 등 말 그대로 젊고 힙한 곳이다. 고시원에서 나와 헬스장에서 씻고 출근하는 나와 화려한 업계는 대비돼서 가끔 혼자 웃는다. 회사에서 밥이나 커피, 간식을 사줄때마다 오늘은 얼마를 아꼈는지 계산하는 나도 좀 웃기다.


10. 스타트업 업계에 대한 보고서나 아티클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미디어에서 나오는 것보다 현장에서 나오는 소식이 빠르다.


11. 유튜브에서나 보던 분들에게 연락을 하고 물건을 주게 된다. 나 개인으로는 하기 힘든 일일 거다. 대출이나 직원을 고용하는 걸 레버리지라고 하는데,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직원이 사장의 명성이나 경력 등을 레버리지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레버리지를 땡겨쓰는 이유는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큰일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레버리지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하겠지만.


12. 제품이 있는 사업은 꽤 신경 쓸 게 많다. 서비스만 있는 곳은 서비스를 특화하거나 재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물건이 있으면 제품과 서비스를 동시에 신경 써야 한다. 그 점에서 저번에 적었던 와이즐리가 일단 꽤 배울 게 많은 거 같다. 둘 중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13.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인턴을 하는 사람이 있다. 조금 들어보니 나에 비해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거 같은데 가끔은 왜 나는 저런 삶을 살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든다.


그럴 때면 예전에 사주와 관상을 공부했을 때를 떠올린다. 디테일한 건 많이 까먹었는데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게 그 결론이다. 물 조심하고 불조심해야 한다는 개소리가 아니다.


단순히 100, 100000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그릇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 100의 그릇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100을 다 행하는 사람이 있다. 100000의 그릇을 가지고 있지만 노력과 운이 없어 50 정도만 행한 사람이 있다. 그러면 이 둘 중 누가 잘난 사람일까.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전자가 잘 살았다.


니체의 영원회귀도, 사주팔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시간이 4차원이라면 우리는 흐르는 공간 속에서 시나리오대로 살아간다는 이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우리를 만든다.


저 친구의 10년 뒤가 나의 10년 뒤보다 더 화려하겠지만, 나는 어제보다만 잘 살면 된다.


14. 창업자들과 기존 직원들을 빼면 내가 첫 정직원이다. 홈페이지 구성원 소개에 첫 줄에 끼게 된다. 무지하게 떨린다.



32일차


1. 안정된 루틴이다. 7시 30분에 일어나 헬스장에 간다. 대근육 위주인 등 가슴 하체를 빨리 하고 9시 30분까지 출근한다. 나머지 자잘한 부위 및 작은 운동들은 밤에 하면 된다.


2.  점심을 다 따로 먹는다. 업무가 너무 분할되어 있기도 하고, 나도 아직 적응 중이라 같이 먹을만한 사람이 없다.


3. 기사식당에서 돼지불백을 시켜먹는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6일 연속으로 먹었다. 어제는 심지어 편의점 도시락도 돼지불백을 먹어, 오늘은 못 참겠어서 닭갈비를 먹었다. 아마 이러고 또 내일 돼지불백을 먹을 거다. 8천 원에 쌈채소에 6가지 밑반찬에 국까지 나오니 안 먹으래야 안 먹을 수가 없다. 6끼 연속 김치찌개를 우려먹던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4. 점심시간도 업무가 있거나 하면 유동적으로 사용해서 30분 일찍 나가거나 1시간 늦게 나가도 된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느긋하게 혼자 담배를 피우고, 애인과 짧게 통화를 하고, 다이소에서 칫솔을 사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릴 수 있어서 익숙해졌다.


5. 음악을 틀어놓는다. 재즈 아니면 가사가 거의 없는 팝송이다. 평소에도 책 읽을 때 틀어놓던 종류라서 좋다. 아직 집중해야 하는 업무가 없어서 오후면 노곤한데, 음악이라도 있으면 한결 낫다. 예전 인턴 할 때는 애들이 가요 같은 거 틀어서 정신이 없었는데 확실히, 일하는 사람은 다르다.


6. 간식이 생겼다. 너무 좋다. 하루에 커피 2잔을 마시고, 간식도 좀 주워 먹는다. 복사도 몰래 할 수 있다. 저녁에 고시원에서 할 게 없으니 사무실에서 시간을 뗴우고 갈 수 있다. 이게 복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7. 나중에 적겠지만 정말 숨 쉬는 것만으로 100만 원 가까이 나간다. 대표는 빨리 퇴근하라고 하는데, 나는 사무실에 있는 게 좋다.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글을 쓰고, 리서치를 하고 싶다.


8. 업계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스타트업에 대해서 보고 들은 것만 많지 직접 일해본 건 처음이라 아직은 어색하다. 일하는 방법이나 호칭이나, 비품이나 이런 게 다 미비돼서 정말 바닥부터 시작이다. 글 추천도 좋고, 댓글도 좋고, 대면도 괜찮을 거 같다. 고견을 나눠주실 분이 있다면 감사드리겠다.


9. 여섯 시 반. 퇴근한다. 첫 주에는 뭘 해야 할지 애매했는데 요즘은 도서관에 간다. 10시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헬스장에 가서 나머지 운동을 한다. 요즘 간식을 주워 먹고 냉동 볶음밥을 많이 먹어선지 지방 빠지는 속도가 줄었다. 조금씩 유산소를 늘리고 있다.


10. 일하고 운동하고 책만 보다 보니 유튜브 보는 시간도 줄었다. 풀영상을 챙겨 보던 게임 채널이 있었는데 못 본 지 일주일은 된 거 같고, 구독 채널들도 오디오만 나오는 영상이 아니고서는 일주일 가까이 못 보고 있다. 글 쓰는 것도 하루 2시간 넘게 운동하고 2시간 넘게 책 읽고 9시간 일하고 겨우겨우 쓴다. 너무 규칙적으로 잘 살아서 나도 신기할 정도다. 주말에는 본가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내지만, 평일에는 정말 기계처럼 산다.


감정을 버리고 습관을 버려야 사람은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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