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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Apr 27. 2024

쓸 말이 없네요

책을 내고

염원이던 책을 냈습니다. 책을 내면서 이전에 있었던 글들을 많이 정리했습니다. 1~2년 전에 300개였던 걸 확 줄여서 100개 정도로 줄이고, 이후에 글을 또 쓰다가 이번에 책을 내면서 확 또 줄였습니다.


이유는 익명에 숨어 여러 가지 주제 및 비밀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냈는데 이제 가족, 지인, 애인, 친구, 대학, 전직장, 전전직장, 전전전 인턴했던 곳 사람들까지 글을 쓴다는 걸 알게 되어버렸으니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1. 심지어 예전에 일본인 친구가 한국에 와서, 자기 애인은 바람기가 많은데도 너무 좋다. 그래서 그녀 때문에 성병에 걸렸지만 그녀를 계속 만나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도 적었습니다. 왜냐면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거든요. 그런데 책을 낸다고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그 친구가 열심히 번역을 돌렸는지 긴 댓글로 축하해 주더군요. 민망했습니다. 상대방에게 누가 될 법한 이야기는 거의 다 지웠습니다. 외국인이면 제 글을 보게 될 일은 없을 거 같았는데 어찌 됐든 남 이야기를 적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2. 그랬더니 쓸 이야기가 없어졌습니다. 처음에 약간의 인기를 얻으면서 시작하게 된 계기도, 가족에 대한 고민과 이성에 대한 고민을 적으면서부터였습니다. 속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익명으로라도 이런 곳에 작가라는 멋진 이름을 받고 글을 휘갈겼습니다. 좋은 해소가 됐습니다. 꽤 좋은 반응도 얻었습니다.


3. 그러다 사진이 있어야 반응이 조금 더 좋다는 걸 알게 돼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기사를 쓸 때처럼 완전 밀접한 내용의 사진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전시나 먹었던 음식 등 아무 상관없는 사진을 올렸습니다. 가끔 글과 아무 상관없는 사진들이 다음 메인에 뜰 때면 기분이 얼떨떨했습니다.


4. 그러다 일상을 공유하는 몇몇 지인, 친구들이 글을 알게 됐습니다. 상처 준 사람이 몇 생겼습니다. 지금도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그 사람에게 나도 상처받았기에 글로서 나는 해소하겠다는 생각과, 수백 수천 명이 보는 공간에 이야기를 공유하는 게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됐습니다. 유명해져서 돈을 벌고 싶다가도, 내가 공유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늘 두렵습니다. 손석구와 전종서가 나오는 <연애 빠진 로맨스> 이야기를 잠깐 꺼내겠습니다. 스포를 약간 하면, 손석구는 칼럼니스트인데 연애를 주제로 기사를 쓰기로 결심합니다. 어플로 만난 전종서와 원나잇을 하게 되고 그녀와 나눈 일상들을 칼럼으로 적습니다. 당연히 원나잇, 연애 등이니 민망한 이야기가 많이 적혀 있었고요.


5. 저는 손석구가 전종서에게 그 칼럼을 들키고 추궁당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공황이신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정말 숨이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게도 비슷한 경험이 몇 있었기 때문입니다. 숨기려고 숨기려고 했지만 글을 쓰다 보면 누군가에겐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겨내려고 혼자서 그 영화를 한 번 더 봤습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6. 그래서 주변 '사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인간'이나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적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에 대한 이야기도 적기 시작했고요. 책을 내게 되면서는 그냥 애매하다 싶은 내용들은 전부 숨김처리했습니다. 1300명의 독자를 만들어주고 140만의 조회수를 얻게 해 준 그 글들을요. 알고리즘은 박살 나 조회수는 독자에 비하면 바닥을 기는 수준입니다.


7. 감사하게도 책을 구매해서 읽어준 전 직장 동료를 만났습니다. 왜 요즘은 글을 안 쓰냐고 묻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정갈하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쓰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니 써지지가 않았으니까요.


8. 그래서 그냥 평소처럼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창작과 해소, 배설의 즐거움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9. 근황이라면, 요즘 투자랍시고 이것저것 건들다 현금이 없어 알바를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당근 알바에 D 일보 인턴, S대 연구원 홍보팀, 작은 스타트업 팀장, SEO 1P 노출, 가입률 500% 개선 이 따위를 적고 물류 용달, 철거, 서빙 등을 신청하는 제 모습이 솔직히 존나게 우습습니다. 이런 단어를 쓰니 알고리즘이 안 띄워주는 거겠죠..? 에라 모르겠다

10. 토익도 2주 만에 취득했고 취준을 하다 마음에 드는 곳에 최종면접을 잡았었습니다. 애인과의 여행 때문에 면접을 취소했죠. 애인이 고대했던 여행이었기에 그걸 갑자기 취소하거나 연기하면 그 친구의 기분이 안 좋을 거 같았습니다. 여행 막바지, 싸울 때쯤이 되어서야 나도 많이 희생하고 왔으니 우리 기분 좋게 여행하자는 조커 카드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 돌아오고 나서 준비하다 보니 갑자기 행복주택의 서류합격이 돼서 그걸 기다리고 있습니다. 1:60 인가 1:6인가 그랬는데 서류 합격 후에도 세 달 정도가 걸립니다. 작년에는 그렇게 신청해도 안 됐는데 갑자기 두 개나 되어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서쪽, 하나는 동쪽에 신청했기에 어디가 될지, 안 될지 몰라 시간이 떠버렸습니다.


12. 그냥 쓰는 생활비도 있고, 책 만들고 홍보하느라 돈도 꽤 써서 몇백 정도의 돈이 갑자기 나가버렸습니다. 지금 예전에 사둔 닭가슴살과 햇반으로 2주를 버티고 있습니다. 지난 2주간 알바로는 한 100 정도 벌었고요. 행복주택 결과 발표 전까지 2주 동안 또 100 정도를 벌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좋아하는 옷도 팔아서 한 30 정도 추가로 벌기도 했습니다.


13. 처음부터 집을 잘 구했으면 이런 버리는 시간 없었을 텐데, 당시 고시원에 살고, 해고도 당하고, 헬스장도 사라져 힘들어 빠르게 집을 구했습니다. 남들 사는 자취방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고시원이나 빠져나오자 하면서 신청했던 벽돌빌라집에서 작년부터 행복주택을 신청했고 1년 반 동안 안 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2개나 대기 중입니다.


14. 마아아안약에 공공기관을 계속 다녀서 돈을 모았다면 지금 5~6천쯤 모았을 거고, 잘하면 지금쯤 생각해 뒀던 그 집을 풀대출+신용대출해서 살 수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저는 그 직장을 진짜 죽을 때까지 다녔었어야겠죠. 누군가와 결혼이나 가정을 이루는 건 물리적으로 가능했을 수도 있었겠네요. 이런 상상은 달콤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꿈이라 아늑하면서도 옥죄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상사와의 불통으로 퇴사 전 3주 정도는 폭식과 토, 무기력으로 보냈습니다. 치킨 두 마리를 먹고 근처 백화점에서 초콜릿이나 쿠키를 왕창 사서 못 먹을 때까지 먹었죠.


15. 20대 초중반 친구들이 있는 공간에 가서 30대로 일을 하는 기분은 좋지는 않습니다. 특히 어린 관리자가 있는 공간은 왜 이렇게 일을 하는 건지, 더 효율적이게는 못하는지 따지려다가도 어차피 한 번 볼 사이니 좀 고생하고 말지. 이렇게 생각하고 불편하게 일을 합니다. 예전에 군대에서 27살이던, 저보다 6살 위의 선임이 있었습니다. 늘 다정다감하고 솔선수범이었지만 혼낼 때는 엄하게 혼냈습니다. 후임들이 실수한 것도 몇 번은 눈감아주며 스스로 하곤 했는데, 아마 그 형도 지금의 저와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휴 답답한 것들.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이제는 제가 그 형보다도 3살이나 많습니다. 세월이 무상합니다.


16. 단순 알바에서 여성분들은 편한 거 시키고, 젊은 남자들이 고생하자는 어설픈 유리바닥은 늘 의문입니다. 사무직이나 기획이 아닌 몸을 쓰는 일에 왜 같은 시급을 주고 다른 성별을 고용해서 다른 일을 시키는 걸까요. 이건 고용주로서도 효율적이지 못한 선택인데요. 얼굴 곱상하고 몸도 잘 쓰는 저는 무대 철거부터 설치까지 땀 뻘뻘 흘려가며 일하고, 그 이후엔 손님 맞는 리셉션까지 하는데 왜 얼굴이 곱상하지도 않은 그녀들은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까요? 이 정도야 고용주들의 효율적이지 못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루는 '힘든 건 저 남자애 시켜'라고 들어서 없던 여혐도 생길 뻔했습니다. 여자 여섯에 남자 하나였습니다. 그녀들이 제대로 된 정장도 갖춰 입지 않을 때, 저는 굳이 굳이 갖춰 입은 셋업 마이를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의자 150개를 설치했습니다. 물론 많이 도와주시긴 했지만 남자 2명만 더 있었어도 작업 시간은 절반으로 줄었을 겁니다.


17. 약간의 불만은 실내에서 일하고, 시급도 2천 원이나 높으며, 힘든 건 2시간밖에 없고, 나머지 시간은 앉아서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하기에 쏙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 전날에 마트 매대에 의류를 깔기 위해 11시간을 밖에서 일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안락함이죠. 게다가 밥값지원과 커피까지. 저는 웃는 얼굴로 고생했다고, 감사했다고 말하고 돌아왔습니다. 언제든 또 불러달라는 기대를 품고 말이죠. 자본주의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만약 행사 참가자들이 여성 응대원을 더 원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죠. 모델에서 여성이 더 받는 이유? 시장이 그걸 원하니까! 얼굴 곱상하고 키 큰 남자보다 평범한 여성 응대원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의자 150개를 나르겠습니다! 안락함과 추가 시급 2천 원만 준다면요! 저는 이런 자리를 얻을 수 있음에 여성이 아니어서 불평하지 않고, 제 곱상한 얼굴과 큰 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18. 알바를 하면서 좀 귀찮은 것 중 하나는, 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행복주택이 어쩌고, 책을 내서 돈이 필요 어쩌고, 최종면접 포기하고 잠깐 대기 중이라는 이야기 어쩌고, 경력 등을 말하기는 너무 귀찮습니다. 3년 가까이 콘텐츠를 만들고 검수하며 관리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콘텐츠 창작자 개인으로서 살아남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좋은 무료 콘텐츠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사람들 살아가는 게 다 뻔하지만, 자세히 들여봐야 재밌습니다. 오늘 하루 보고 말 사람들에게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 버리는 것도 싫고 자세히 들려주느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건 귀찮습니다.


19. 하루는 한 미인 여성분과 알바 중간에 밥과 커피를 먹으러 갔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핸드폰을 내려놓고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는데, 편하게 핸드폰 보면서 밥 드시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딱히 대화는 안 헀습니다. 중간에 '혹시 나이가' '혹시 MBTI가' 두 가지를 묻기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20. 저는 늘 즉답보다 생각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왜 일을 이렇게 했냐는 질문에, 이게 혼내려고 일부러 세게 말하는 건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아니면 개선안을 내놓으라는 건지, 상황을 설명하라는 건지 등이 헷갈리곤 했습니다. 하루는 이렇게 의사소통을 불명확하는 게 답답해서 혼자 피식 웃었는데, 혼나는 와중에 웃냐며 더 혼나곤 했습니다. 웃긴 걸 어떡하겠습니까. 이걸 해결할지 말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태도가 문제라고 하니까 웃음이 안 나올까요. 전 사회성이 좋은 편은 아닌 거 같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회사 관련 유튜브를 정말 많이 봤고, 몸으로 겪은 것도 많고, 읽고 들은 것도 많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고 접해왔던 당연해야 하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회사생활에 신물이 많이 났습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 회사는 욕먹는 값도 포함되어 있는 거야. 이런 부모님의 말을 솔직히 거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 부모님이 이 거지 같은 충고들을 늘 명심하고 되새기며 3,40년 일한 대가가 저라는 생각에 약간은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늘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21. 아무튼. 그래서 저는 나이는 적당히 답해줬고, MBTI를 묻는 질문에는 5초 정도 고민했습니다. 나이는 예의상 꺼낸 질문이고, 그다음에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거다. 그리고 I세요?라고 묻는 것도 아니고 MBTI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는 건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 정도다. 여기서 ENFP 같은 걸 말하면 엥 의외네요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약간의 반전을 주면서 재밌게 전환할 수 있겠지. 그런데 난 어제 매장에서 의류를 깔았고, 이따 행사 철수하면서 저 의자를 다시 접어야 하고, 내일은 카페 알바를 가야 한다. 미인인 여성분이랑 하루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귀찮은 건 사라지지 않겠지.


22. INTP입니다. 답하자 그녀는 "아!"탄식을 하고 다시 핸드폰을 봤습니다. 성공적인 대화였죠.


23. 대학 친구들이 본다면 좀 놀랄 수도 있겠네요. 꽤 활발하고 리더까진 아니어도 부리더 정도는 되는 포지션이었는데. 원래는 이런 캐릭터입니다. 인싸로 살아온 시간보다 아싸 찐따 오타쿠로 살아온 시간이 3배는 깁니다. 아무튼 그래서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2주 동안 더 많은 돈을 벌고, 파고들려는 분야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게 중요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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