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취향의 획일화
1. 인테리어를 아주 조금 알게 되면서 느낀 건, 대부분 집 꾸미는 게 비슷비슷하다는 거다. 마치 예전 우리가 봄이면 청자켓, 트렌치 코트를 입고 나이키 범고래를 신었다고 놀렸던 것처럼 생각보다 비슷하다.
2. 오늘 깊은 취향의 어쩌구 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패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다. 추천을 제일 많이 받은 댓글이 눈에 띄었다.
깊은 취향 어쩌구 하는 사람들 중에 근본이라는
일본 브랜드 몇 가지 빼고 말하는 사람 아무도 없음
3. 약간 찔렸고, 크게 공감했다. 자기 취향을 보여준다는 인간들이 왜 다 똑같은 조명과 똑같은 선반과 똑같은 소파를 사는가. 웨어하우스, 풀카운트, 오어슬로우 등 비슷비슷한 브랜드를 말하며 근본과 취향을 말하는가. 그들이 언급하는 브랜드들은 10개 내에서 정리되고, 아무리 넓혀봐도 20개 내에서 그들 취향의 99%가 나온다.
4. 취향을 드러내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개성이고, 개성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언급하는 브랜드들은 오래 되기도 했지만, 약간은 비싸다. 게다가 취향러(이건 취향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통칭하겠다)들은 역사와 전통 디테일에 대해서 줄줄 꿰고 있다.
5. 위 글에서 한 번 언급한 적 있다. 남성 패션의 역사와 전통, 디테일을 파헤쳐 소개하는 '클러치'와 '세컨드' 매거진이 있다. 이 두 잡지를 전개하는 회사의 편집장은 막말로 꼴리는대로 입는다. 주문제작해서 가죽코트를 만들어입기도 하고, 신발도 두 세개를 돌려신는다. 이 사람은 전세계에서 옷이나 신발 등을 매일매일 받을 텐데도 이렇다. 그는 10개 브랜드만을 줄줄 외우며 살지 않는다. 그날그날 입고 싶은 걸 입는다.
6.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집 공부 알바 독서만 했던 나에게 '풍성한 취향'이라는 건 멋쟁이가 되는 가장 쉬운 법 같았다. 패션 브랜드도 파고들었고, 인테리어도 파고 들었고, 교양과 지식도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을 파고들다보니 의문이 들었다. 취향 있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다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닌가. 그들의 선반은 USM, 조명은 아르테미뗴나 일광전구, 인테리어는 미니멀을 곁들인 미드센츄리다. 패션은 클래식 아니면, 근본 브랜드를 곁들인 아메카지다.
7. 어떻게 보면 취향러가 되는 방법은 정해져있는 거 같다. 특정 브랜드와 특정 스타일을 줄줄 외우는 거다. 그런데 취향러 20명이, 다 똑같은 취향이라면 그건 진짜 취향인가? 우리 엄마부터 영희네 엄마 철수네 아빠 20명을 모아봐도 다 다른 걸 좋아한다. 어머니는 천주교다. 아버지는 무교다. 어머니는 심리상담 채널을 좋아한다. 아버지는 사건반장 같은 프로를 좋아한다. 어머니는 요즘 홈쇼핑도 하시고 온라인 쇼핑에 입문하셨다. 아버지는 오프라인에서 창고세일하는 곳에서만 옷을 산다. 어머니는 군것질을 좋아하고, 아버지는 싫어하신다. 어머니는 가끔 꾸미기도 하시나, 아버지는 웬만하면 등산복만 입는다. 어머니는 새 가구를 사고 싶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추억이 담긴 가구들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8. 이렇게 한 집 사는 가족의 '취향'도 가지각색인데, 취향러라고 하는 사람들의 취향이 비슷비슷한 걸 보면 좀 신기하다. 그래서 나도 나 좋은 걸 사기로 결심했다. 아. 이래서 내가 취향러가 안 되는 걸까? 애매모호함을 선호하는 애매모호한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진짜 취향러가 되려면 스스로를 밀어붙였어야했다. 뽀빠이와 빔즈에 감탄해야 했고, 츠타야의 라이프스타일 산업의 개혁에 감탄해야 했다. 아르떼미테 전구와 일광전구를 사고, 허먼밀러 체어를 사야 했다. USM 선반과 각종 선진 IT기기들을 사용해야 했다.
7.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취향을 고민해서 샀는데, 그 취향이 남들이랑 똑같다는 게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미디어와 발 맞추어가는 취향러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네 같이 세상 흘러가는 거 몰라도 가진 걸 소중히 하고 나만의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