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기업은 지루하다 생각했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꽤 합리적이고, 스타트업이라는 곳들도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굴러간다는 생각을 했다.
1. 인맥
일을 함에 있어 능력은 비슷하다. 개발자나 크리에이터가 아닌 이상 슈퍼스타는 없다. 협동과 조율의 싸움이다. 소통이 잘 되어야 일을 잘 한다 가정하면, 소통은 어떻게 해야 잘 되는가. 물론 맥락과 배경 설명도 중요하지만 가장 쉬운 건 친밀감이다. 친밀감에서 쌓인 신뢰다. 일잘러로서 얻어진 신뢰는 쌓기 어렵지만, 같은 학교, 같은 직장, 같은 지역이라는 소재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친밀감 쌓기 소재다.
2. 친밀함
일은 친밀함에서 나온다. 친밀함은 같이 있는 시간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같이 등산도 가고 회식도 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이게 싫다지만, 어쩌면 그 싫은 것들이 오히려 회사에서 통하는 방식일 수 있다. 인간은 꽤 비합리적이기에 일잘러지만 같이 등산 안 간 놈보다, 일못러지만 같이 등산 간 놈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한다. 스타트업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으면 크고 작은 행사를 연다. 이게 대기업의 등산과 야유회랑 다를 게 뭔가?
3. 복잡한 인사
어려운 채용방식이나 복잡한 방식은 지원자와 구성원을 거르는 과정이 된다. 그 사람의 실력도 있지만 열정을 거를 수도 있다. 구글이 10단계의 면접을 거친다 그러면, 실력적으로 안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력이 되는 사람 중 일부도 '와 무슨 10단계야'하고 지레 포기해버릴 거다. 실력이 덜하지만 10단계 면접을 어떻게든 치루려는 사람과, 실력이 뛰어나지만 면접을 보지도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회사에 열정을 가지고 있을까? 누가 더 회사를 오래 다니려고 할까? 전자일 거다.
4. 인적성검사
인적성검사는 고등학교를 잘 졸업했다면, 인서울 정도의 대학을 가져왔다면 보통 풀 수는 있다.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다. 시간만 있다면 할 수는 있다. 시간이 없을 뿐이다. 빠른 시간 내에 이걸 해결하는가?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는가? 경력과 이력이 있다면 증명할 수 있겠지만 신입급 지원자에게는 검증하기 어려우니 이런 걸로라도 검증한다. 어차피 지원자는 넘쳐나니 정말 좋은 인재가 몇 쯤 걸러져도 괜찮다. 그 다음 괜찮은 인재 정도는 이 의도를 파악하고 뚫어내니까.
5. 시스템
그렇게 자율성을 준다는 스타트업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시스템, 프로세스를 외친다. 결국 사람은 바뀌고 남는 건 시스템밖에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대기업의 시스템에서 나온다면 먹고 살 게 없다지만, 생각보다 시스템을 잘 따르는 것도 쉽지 않다.
6. 학력, 학점, 성별
대기업은 보수적이다. 리스크를 피하려고 한다. 프로세스가 잘 구축되어일 수도 있고, 시스템을 나가면 먹고 살 게 없기에 리스크를 안 지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일 수도 있다.
학력과 학점도 비슷하다. 학력이 낮다는 건 학교를 잘 다녀야 한다는 시스템의 말을 안 따랐다는 거고, 학점이 낮다는 건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시스템의 말을 안 따른 거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회사라는 시스템은 잘 따를까? 기업 인사 담당자는 굳이 리스크를 질 필요가 없다. 이미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섰으니까.
성별도 마찬가지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지방의 대기업들이 여성을 안 뽑는다는 건 다 아는 이야기다. 하나. 이미 남성들이 이공게로 많이 가서 남자들의 판이다. 남고는 얼마나 편했는가. 여성이 한 명 등장하는 걸로 굳이 조직을 어지럽힐 필요는 없다. 둘. 여성은 출산과 임신의 가능성이 있다.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잘 있던 근로자가 갑자기 1~2년을 쉬어버린다고 하면 고깝다. 가만히 나가는 비용만 생기는 거다. 그렇다고 저 사람을 대체 못하는가? 이미 잘 지어진 시스템이 있다. 나중에 출산휴가 안 지켜줬다고 공론화당하는 그런 걸 생각하면 귀찮기까지 하다. 그냥 안 뽑아버리면 된다.
7. 형식적 의사소통
권한과 책임이 명확해진다.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시스템을 어지럽히는 부품이 있다면 잘라내야 한다. 괜찮다.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이크로 매니징이라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하기에 모든 걸 알아야 한다. 윗선도 마찬가지다. 꼰대라고들 하지만 결국 책임지는 건 윗선이기에 그들은 보고를 받아야 한다. 근황을 알아야 한다. 이게 스타트업이 말하는 잦은 공유, 투명한 공유랑 다른가?
결국 회사 생활이라는 건 다 비슷하다. 사람들이 하는 싸움이고, 시스템을 만들거나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런 시스템 안에 있으면 지루하고 답답할 거라 생각했지만 반대로 시스템은 구성원을 지켜주기도 한다. 안정적인 내게도 만든다. 혁신을 부르짖는 곳도 생각보다는 다들 비슷하다. 그리고 다들 비슷하게들 바뀐다.
대기업의 방식이 이해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