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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 orozi Jul 17. 2022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봐야 아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

2022. 07. 17. 


저는 ISTJ입니다. 저는 혈액형이나 별자리 성격 같은 건 소소한 거리마저 신뢰하지 않는 반골덩어리인데요, MBTI는 제 생각을 그대로 카테고리화한 것이다 보니 조금은 편리하더라고요(이젠 MBTI도 끝물인 건 비밀). I와 E는 와리가리하지만, S는 정말 한결같습니다. 저는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먹 해봐야 아는 경험주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를 시작하면 끝까지 보고 싶어 하는 불필요한 '가오덩어리'기도 합니다.


한창 진로를 고민하던 대학교 3학년, ㅎㅈㅁㅈ라는 독립출판사에서 《퇴사의 이유》라는 간행물이 나왔습니다. 그전까지 '출판' 관련된 책이 책의 숭고함과 고고함 그리고 불쌍한 편집자의 숙명 같은 걸 다뤘다면. 이 책은 그런 행태에 '잣이나 까잡숴'라고 말하는 듯 생생하고 리얼한 출판인의 기쁨과 슬픔이 담겨 있었죠. 작고 귀여운 연봉과 그러지 못한 인간관계, 호황인 적이 없었기에 불황이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침체(recession)에 가까운 삶의 현장... 저는 이 책을 보고 출판에는 학을 떼고 다른 길을 찾...


았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진 않겠죠? 《퇴사의 이유》에는 익명으로 투고된  오히려 그때 더더욱 비벼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이 다 별로라고 해도, 나한테도 별로가 아닐 수 있잖아요.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라는 나이브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운이 좋게 대학교 졸업 전에 편집이라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좋은 동료 분들을 만난 덕에 아직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아직 4년 차라 시장을 통찰하는 인사이트는 부족하지만, 경험을 돌아보니 퇴사의 이유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습니다. 의외로 비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편인데, 이 부분은 다른 글에서 다시 다뤄보겠습니다.


 책을 다 보고 나니 정말 싱숭생숭했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주제인지라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그런 점들은 내가 원하던 바기도 하고 알고 들어갔음에도 정말로 이렇다는 거구나, 싶어서 착잡-했다. 나름 편집자의 꿈을 고등학생 때부터 이어왔음에도 약간의 회의가 생겼다면 설명이 충분할까.. 사실 '사람'이야 어딜 가든 그러지 않겠냐만 돈, 그러니까 급여 관련한 내용은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여과 없는 사실들이었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서 묘사된 시체 공시소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에휴..

 물론 그렇긴 해도 내 행복과 인생에 대한 눈높이가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내 꿈이 변할 것 같지는 않겠다만, 글쎄, 2년 뒤에도 이 책에서 펼쳐지는 불편한 사실들이 내 눈앞에서도 이어진다면 마냥 웃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책을 만들고 읽은 사람들이라면 더 좋은 삶을 추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때가 되면 조금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를 품어본다. 

_ 2017. 03. 31. 《퇴사의 이유》 독후감 中


여하튼 두 번째 회사로 이직할 때도 많은 분들이 말렸었습니다. 특히 첫 회사에 만난 선배님들이 극구 만류했습니다. 악명이 제법 높은 대감집 출판사였는데, 그때도 역시 경험주의자+프로반골러의 기질로 과감하게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1주일 만에 선배님과의 카톡방에 '진짜 ㅈ됐다'라고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거짓말 안 하고 정말 1주일 만이더라고요. 그래도 배울 점은 굉장히 많았고(이렇게 포장하면 되겠죠), 11개월쯤에 슬슬 과호흡이 오는가 싶어서 퇴직금이라도 타 먹자고 1년을 버티고 나왔습니다.


이러나저러나 경험론적 접근은 꽤나 도움이 됐습니다. 편집자는 어딘가에 컨택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저자를 찾아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보통은 '거절'이 많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한다면 투고 원고만 보면서 손을 빨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경험'을 통해 거절이 익숙해지면, 저자든 역자든 외주자든 추천사든 뭐든 겁먹지 않고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무조건 내가 찍먹 해보자'는 기질이 피를 부를 때도 있지만, 아홉 수를 반쯤 흘려보낸 지금 돌아보면 그래도 플러스 마이너스를 따지면 플러스가 많지 않았나도 싶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이러한 경험에서 자기 주관을 찾는 겁니다. 보통 이 바닥에서는 다들 비관적인 얘기만 하거든요. 실제로는 은근히 괜찮은 것도 '쓰레기'로 간주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이런 여론에 흔들리지 않되, '아님 말고' 마인드를 탑재하는 건 정말 일상을 견뎌내는 삶의 무기가 됩니다.

노션에 지금까지 만든 책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 있다는 게 가장 큰 출판의 맛이죠 이것도 ISTJ 같은 정리일까요


앞으로 책, 더 나아가 콘텐츠를 만들 예정입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만큼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편집자도 변해야 하는 부분이 많을 겁니다. 앞으로도 이런 똥된장찍먹 마인드가 도움이 됐음 하네요. 공자는 서른을 '이립(而立)'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라는데요, 원래는 이런 '가라사대'에 관심을 둔 적이 없지만, 어쩐지 서른이라는 뭣도 아닌 숫자 앞에서 솔깃해지네요. 아홉 수는 또 10년 뒤에 오겠지만, 29는 이번뿐이라고 생각하니,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스칩니다. 그런다고 뭐 엄청 갑자기 달라지진 않겠지만요. 하지만 10년이라면 조금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혹시 10년 후, 39살에 또 자기 객관화할 기회가 있다면 지금 이 글을 다시 한번 들춰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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