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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tor navorski Oct 05. 2021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맨하탄

쌀쌀해진 날씨에 기다렸던 긴팔과 외투를 꺼내는 가을이 왔다.

올 듯 말 듯, 기쁜 마음에 긴팔을 입으면 아직 여름 같은 햇빛에 당하고 말지만 그래도 분명히 가을이 왔다.


초가을 바람을 맞으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살짝 열어둔 창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기분 좋게 깨는 아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 학기를 맞은 학교를 향하고

아직은 이른 가을 아침 냉기에 살짝 추위를 느끼며 기다리던 버스도.


저녁이 되면 다시 추워지는 날씨에 꺼내 입던 얇은 재킷들

일 년을 기다려 단 일주일을 입기 위해 사두었던 가을 외투를 입기 위해

가을엔 언제나 한 팔에 외투를 걸치고 다녔다.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로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하던 초저녁의 술자리도.

어스름이 올라오는 초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추위가 느껴질 때까지 주고받던 잔디밭 위 대화들도

가을의 기억은 언제나 밖에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느끼고 풍경을 마주하며 기분 좋은 마음만이 가득한 날들.

그리고 동시에 지독하게 외롭고 슬픈 마음 느끼기도 한다. 한 여름 더위와 습기가 가득했던 마음이 갑자기 비어버려서일까.

비워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 천국 같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봤던 영화들은 어느새 그때의 마음들과 함께 가을이 되면 다시금 생각이 난다.




맨해튼 살인사건 (Manhatan muder mystery) 1993

뉴욕의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 부부가 이웃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미스터리 코미디 영화


우디 앨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맨해튼 살인사건’만은 아직 포기할 수 없다. 혹자는 이 작품을 ‘말발로 조지는 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우디 앨런 특유의 코미디가 가득하며 그의 냉소적인 유머만으로 한 시간 반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캐럴(다이앤 키튼)과 래리(우디 앨런) 부부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웃에 사는 하우스 부부의 초대로 함께 저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 하우스 부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캐럴은 하우스 씨가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고 캐럴과 래리의 친구들까지 가세하면서 일은 점점 더 커진다.


극 중 우디 앨런이 연기하는 래리는 신경쇠약에 걸린 캐릭터(그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러하듯)로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캐럴을 옆에서 호들갑을 담당한다. 호들갑스러운 래리의 한마디 한마디가 영화의 톤 앤 매너를 결정한다. 자연스럽게 극의 긴장을 조절하는 유머는 우디 앨런을 싫어해도 그의 영화는 종종 찾게 되는 이유다.


특히 하우스 부부를 쫓아 찾은 호텔에서 화장했다던 하우스 부인의 시체를 찾아내는 일련의 장면들은 웃음이 필요할 때면 찾아가는 좌표 중 하나이다. 하우스 부인의 시체를 발견하고 패닉 상태에 빠진 래리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캐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죽은 시체에게 선물을 주라는 헛소리를 하거나, 엘리베이터에 갇혀서는 달리는 종마를 떠올리며 공포증을 이겨내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연기한다.


갑작스레 다가온 가을 날씨에 텅 빈 마음이 느껴지고 점점 빨라지는 저녁시간이 무료하다고 느껴질 때면 이 작품을 찾는다. 왜 인지 더운 여름에는 더위에 지쳐 인지하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이 가을에는 무섭게 다가온다.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에 짧아지는 해를 보면서 올해도 이렇게 뜻 없이 떠난다는 좌절감에 휩싸인다


어두워진 저녁 별일 없는 가을밤에 텅 빈 마음이 느껴진다면 맨해튼 살인사건을 켜보자. 1시간 40분 동안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우디 앨런식 개그에 웃다 보면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며 잠자리를 준비하게 된다. 우디 앨런의 수-많은 작품 중 웃으며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코미디라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중년의 부부인 캐럴과 래리는 살인사건을 수사를 계기로 활기찬 모습으로 변화한다. 맨해튼 살인사건은 치밀한 수사나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보다는 살인사건 수사를 진심으로 즐기는 캐럴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만큼 캐럴을 따라가는 관객들도 동시에 미스터리의 즐거운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사건을 수사할수록 얼굴에 생기를 되찾는 캐럴 모습이 점차 나에게 덧씌워진다. 너무 나아가는 것 같지만 어쩐지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꼭 재미난 일을 하고 싶다는 에너지를 얻는다.




‘맨해튼 살인사건’은 실제로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한 아파트와 뉴욕 곳곳에서 촬영되었다. 캐럴과 래리는 뉴욕 곳곳을 누비며 하우스 씨의 행적을 수사하는데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하키 경기, 메트로폴 라탄의 오페라 공연, 그래머시 마크, 미국 국립 예술 클럽 등 매 해튼 명소 곳곳이 등장한다.

스포츠와 예술 친구를 즐기는 도시. 가을빛 화면 속에서 일은 안 하고 틈만 나면 친구들과 만나 술과 음식 수다를 즐기는 뉴요커들을 본다. 어두운 식당에서 노란 조명을 켜고 서로에게 집중한 뉴욕의 저녁식사는 저만 꿈꿔보나요? 어쨌든 겪어보지 못했지만 언제나 꿈꾸는 환상 속의 뉴욕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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