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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동훈 Jan 31. 2023

붕어빵과 할아버지

늦게까지 열린 가게를 보며 할아버지 생각

한창 추울 때 써놓은 글이다.



붕어빵의 계절이다.


늦은 밤 늦게까지 열고계신 포장마차에 들어가 붕어빵을 사먹었다. 4개에 3천원.



어릴 적 나와 동생을 데리고 붕어빵을 먹으러 갔던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 나중에 커서 늦게까지 붕어빵이 남아있는 가게를 발견하면, 남은 붕어빵을 전부 사서 집으로 가져올 생각을 해라 "



그렇게 말씀하셨던 아버지는 종종 붕어빵이나 호떡, 그리고 여러가지 주전부리가 늦게까지 남아있다는 이유로 사서 집에 들어오시곤 하셨다.



이 말을 듣고 어린 나는, " 추운데 늦게까지 장사하시느라 고생하시니까 사오라고 하시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이후로 종종 늦은 밤 붕어빵 가게에 갈 때면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의 붕어빵을 사서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다.



근데 요즘 들어 나이 드셔 홀로 계신 할머니를 모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아버지가 남은 붕어빵을 샀던 이유는 단순히 남은 붕어빵을 팔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남은 붕어빵에서 과거 시장터에서 과일 장사를 하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날, 그리고 당신의 유년시절이 생각나신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故심병호 선생의 고향은 임실이었다. 심씨가 모여사는 마을에서 일제의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 올라가셔서 여러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서울에 큰 물난리가 나서 모든 장사를 망치게 된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후 전주로 내려오셨고, 옛 교동 현 전주한옥마을 오목대 밑 구석에 터를 잡으셨다. 남부시장에서 다시 과일장사를 하셨고, 몇 년 후엔 세탁소를 차리셔 운영하시면서 5남매를 키우셨다.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얘기를 들어보면 찢어지게 가난하고 어려웠다는데(한가지 일화로 울 아버지는 집이 가난해 수학여행 갈 돈이 없어 친구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수학여행을 가셨다고 한다.), 그렇게 키운 아들 딸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셨을 때, 동네에선 할머니 할아버지를 영웅대접 하셨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등산이셨는데, 30년간 다니신 산악회에서 할아버지의 유일한 자랑은 5남매를 모두 대학보내신 것이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 손주들에게도 당신의 평생 감사할 것은 아들 딸들이 대학 가고 가정 잘 꾸려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매번 말씀하셨다.



붕어빵을 먹으면서 울 아버지는 왜 당신의 아버지를 떠올렸을까. 과일 장사를 하시던 할아버지는 당일 내놓은 과일이 다 팔리기 전까지 들어오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끝까지 팔리지 않은 과일을 보시고는 굉장히 아쉬워하셨다고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명절에도 설빔을 입지 못하셨다고 한다. 설날 당일이 엄청난 대목이니까 그날 과일을 다 팔아야 아이들에게 새 옷을 사주실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과일을 팔고 서둘러 자식들을 데리고 남부시장 옷가게를 돌아다니며 새 옷을 사 입히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네 5남매는 항상 설연휴가 끝나고서야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팔리지 않은 붕어빵을 보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떠올렸나보다. 늦은 밤 끝까지 팔리지 않은 과일을 가져오던 할아버지의 표정, 설 당일 대목이라며 아침 일찍 나가 장사하고 밤늦어서야 아이들 설빔을 사입히시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을 보셨던 것이다.



늦은 밤, 남은 붕어빵을 전부 사서 들어가는 길에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앞으로도 늦게까지 열려있는 가게가 보이면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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