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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중유강 Jun 21. 2024

누군가 내 수치심을 재료 삼아 돈을 번다

혐오의 시대, 우리가 상실한 것은?


셰임 머신 (The shame machine – who profits in the new age of humiliation)
흐름 출판, 캐시 오닐 지음

1부. 수치심은 돈이 된다 ( 비만 / 약물중독 / 빈곤 / 외모 )
2부. 혐오는 어디서 시작하고 확산되는가 ( 사이버 불링 / 차별의 네트워크 / 인셀 )
3부. 정의는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 ( 공공에티켓 / 촛불 집회, 미투 운동, 부당해고 / 자아존중감 )

주문한 택배 박스가 도착했다. 이름, 주소 밑에 주문한 상품명에 ‘여성용 티셔츠 size(L) 이라고 적혀있다. 맞게 도착했다는 산뜻한 뒤로 size(L) 이라는 단어에서 묘한 기분이 든다. 이걸 택배 아저씨가 보섰을까? 내가 L size를 입는 여자라고 비웃지는 않았을까. 사실 택배 아저씨의 관심사는 오로지 정확한 주소로 너무 늦지 않게 물건을 배달할 뿐이지만 비만 수치심에 사로잡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수치심 안테나를 켠다.
저자는 이것이 수치심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수치심은 만성적인 심리 상태로 모든 삶을 통제한다. 수치심은 단순한 논리를 넘어 온몸에 뿌리를 뻗는다(32).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치심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활동한다. 수치심은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그의 명령을 따른다. 수치심은 언어나 종교처럼 내면에 깊게 자리 잡는다. 머릿속에도 장벽을 세우고, 그 장벽을 넘으면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선택을 피하고 몸은 움츠러든다. 수치심은 그렇게 삶을 잠식한다. 혹자는 지금을 혐오의 시대라고 한다. 부자는 빈자를 혐오하고, 빈자는 부자를 혐오하고, 남자는 여자를 혐오하고 여자는 남자를 혐오한다.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상실한 것일까.

에릭슨의 발달과업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만 2~3세에 ‘수치심 vs 자율성’이라는 발달 과업을 수행한다. 그때부터 우리와 함께 한 수치심이니 우리는 수치심과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앞선 문단에서 나는 ‘비만’ 수치심에 대한 경험을 언급했지만, 수치심은 다양하다. 이 책의 1부는 비만, 약물중독, 빈곤, 외모의 카테고리에서 수치심이 어떻게 작동하며, 수치심을 이용해 누군가는 돈을 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지갑을 열게 될 때를 생각해 보자. ‘이 물건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물건을 살까? 우리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하필. 왜. 나는. 지금. 그. 광고를. 보고. 결제 버튼을 눌렀을까.

수치심을 이야기하면서 이 책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선택’이다. 자신의 결함에 어떤 식으로든 대처하지 않으면,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는 것. 비만부터 약물 중독까지 지금까지 살핀 다른 수치심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적절한 선택은 기본적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 하지만 어리석은 선택으로 결함을 안고 산다면, 그것은 본인 잘못이다(119).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자기혐오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면 수치심 2단계인 부정의 단계에 돌입한다. 합리적이지 못한 근거를 들어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인지부조화 단계에 들어선다. 인지부조화 상태는 유사과학, 잘못된 통계, 허황된 약속들과 함께 나를 위안시켜 준다. 도망치고 싶거나 나와 같은 수치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가 위안을 얻고 싶어 진다. 이렇게 수치심 비즈니스는 돈이 된다. 조롱은 트래픽을 올리고 수익을 높인다(136). 나는 이제 평안하다.

이 책은 푸에블로 광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푸에블로 광대는 미국 뉴멕시코주와 애리조나주에 살고 있는 호피족으로 이틀에 걸친 계절별 의식에서, 몸에 진흙 줄무늬를 그린 광대들이 광장을 둘러싼 공동체 구성원 앞에서 연극을 한다. 이때 광대들은 사회나 인간의 도덕을 전혀 모른 채 의식에 뛰어든 ‘태양의 아이들’이라고 가정하고 연기한다. 규율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 행동이나 한다. 그러나 이튿날 정오 무렵이면 이들은 규율을 이해하고 기본적인 윤리를 습득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한마디로 광대들은 호피족답게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이 과정에서 광대들은 부족에서 용인하는 행동과 아닌 행동을 관객에게 가르친다. 공동체의 구성원을 조롱하는 광대의 공연은 비웃음과 헐뜯기로 끝나지 않는다. 의식 후반부에는 광대와 조롱당한 사람 모두 공식적으로 용서받는다. 이제 조롱당한 사람은 죄를 말끔히 털고 부족으로 돌아온다. 물론 그를 주시하는 눈길이 늘 따라붙겠지만 말이다. 이런 의식은 따돌림이 아니라 구슬리는 것처럼 보였다. 호피족 의식은 규범을 위반한 사람에게 몹쓸 인간이나 패배자라고 낙인찍는 게 아닌, 잘못을 고치라고 충고하는 이벤트였다. 우리가 속해있는 집단의 모습은 어떤가. 집단의 경계와 소속감이 그 어느 때보다 옅은 지금,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동료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인터넷과 SNS에는 우리의 모든 일상이 기록된다. 오늘도 나는 어느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했고 개인정보 수집 동의 인증을 했다. 10년 전의 과거도 당장 어제 일처럼 어딘가에 떠돌아다닌다.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고 잘못을 깨달았고 그래서 지금은 그때와 달라졌다고 말해도 인터넷에 박제된 나의 과거는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우리의 과거는 잊힐 권리를 상실했다.

네트워크화된 수치심 엔진은 갈등을 부추기고 널리 퍼뜨린다. 지금처럼 의사소통이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세상에서, 새로운 기준을 따라가고 그에 맞춰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바꾸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매우 불쾌한 사건과 사회적 마찰이 발생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수치심은 이런 불편한 상황을 부채질한다. 수치심의 힘이 사회적 기대에 적응하도록 사람들을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158)

‘나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인터넷 뉴스에서 만나는 기가 차는 뉴스를 보면 우리는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 어떤 상황이 와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 대부분 그렇다. 자신의 허점을 직시하기란 어려운 일이어서 다들 자신에게 관대한 편이다. 물론 선의를 지닌 사람도 많다. 보통은 선의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 시험대에 올랐을 때, 우리의 행동은 스스로 내세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수치심 렌즈로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즉 모든 관계와 만남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무심코 흘린 말과 농담조차 남에게 수치심을 전달하는 매개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각자 여러 형태의 수치심을 주고받으며 이 감정과 엮인다. (179)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존재가 아니다. 2010년 남편과 동반자살한 최윤희 박사가 떠오른다. 그녀는 행복전도사였다. 행복하게 살라며 책도 쓰고 강연도 많이 했던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말했던 행복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몸에 이상이 생겼고, 그로써도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겠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보여준 그녀의 말과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토록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몇 줄의 말과 글로 사람을 설명할 수 없고,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눌 수도 없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미친놈이 될 수 있고, 악플러가 될 수 있다. 속단하지 않을 여유와 인터넷에서 떠드는 이야기들에 휩쓸리지 않을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미투 운동과 연예인의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날 때를 떠올려보면 ‘다시는 활동하지 못하도록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쪽팔리게 만들어서 인생 끝장내버리자’는 마음으로 그의 과거를 샅샅이 파헤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실어 나르는 정보들을 안전하게 관람하며 쉽게 ‘나쁜 놈 맞네’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렇게 끝장 난 사람들을 우리는 어떤 시선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다. 그가 다시는 나와 같은 하늘에서 숨 쉬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정말 살만한 가치가 없는 인생인가. 나 역시 그런 범죄자를 옹호하지 않으며 처벌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선량한 사람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느끼기 때문이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고 벌을 받고 잘못된 행동을 고쳐서 같은 잘못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느낌이다. 말로 하는 사과는 말뿐인 사과가 되고, 그 사과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릎 정도’ 꿇어줘야 진정한 사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그 무릎 꿇는 ‘장면’을 누군가는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살면서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일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 보면, 그런 사과를 요구하는 순간 다시금 수치심이 고개를 든다. 수치심이 나를 괴롭혔던 방식 그대로 잘못을 저지른 그 사람도 괴롭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습성을 캔슬 문화라고 한다.

캔슬 컬처(영어: cancel culture) 또는 취소 문화(取消 文化)는 주로 저명인을 대상으로 과거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발언을 고발하고 거기에 비판이 쇄도함으로써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 상의 현상이나 운동이다. 이 배척의 대상은 "취소되었다"라고 한다. "캔슬 컬처"라는 표현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와 검열에 대한 논쟁에서 사용된다. ( 출처: 위키백과 )

한마디로 끝장 내버리겠다는 것이다. 일종의 결벽증 같기도 하다. 이런 사회에 ‘다음’은 없는 것 같다. 그동안 권력자들이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힘이 있다고 휘둘렀고, 그게 권력이라며 힘없는 자들을 조롱했다. 미디어는 그것을 보도하고 콘텐츠를 만들어내며 ‘억울하면 너도 힘을 가지라’고 부추겼다. 우리가 촛불 시위를 하고 대화를 촉구하는 이유는 단지 그 잘못을 저지른 개인과 집단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왜 그 행동이 잘못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같은 잘못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어제 보다 조금 나은 오늘과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하나씩 없애고 깨끗하고 무결한 사람들로만 이 세상을 채우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쯤에서 푸에블로의 광대를 다시 떠오른다. 이 책의 저자는 ‘건전한 수치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수치심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만큼 우리는 수치심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수치심을 잘 다룬다는 것은 집단 내 구성원을 배척하지 않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그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멋진 것을 자랑할 줄은 알지만 잘못을 시인하는 멋진 방법은 알지 못한다. 잘못을 시인하는 순간 인생이 끝날 것처럼 인정하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하는데 온 에너지를 다 쏟는다.

이것을 무엇에 대한 상실이라고 해야 할까. 다음의 상실? 도덕의 상실? 중간의 상실? 무엇의 상실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반대로 무엇이 있으면 지금의 상황을 조금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주침의 상실’이라고 정해보려고 한다. 너무 낭만적인가.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우리는 격리되었고 단절되었다. 힘들어했지만 그 안에서 편안함도 경험했다. 그 이전부터 이미 우리는 단절되기 시작했지만 코로나19는 부르기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우리는 그렇게 역병을 지나며 조금 더 마주치지 않는 삶에 익숙해졌다. 마주치지 않아도 내 삶을 가꿀 수 있었고, 적당히 ‘읽씹’ 하면서 사는 것을 양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는 깔끔하고 안락하고 매끈하게 정리되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얼굴 보고 얘기하면 쉽게 풀릴 일들을 ‘안 보고’ 얘기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강력한 폭탄들을 준비해서 던진다. 그저 상대방의 타격감을 ‘상상’하며 나의 최선을 던진다. 그렇게 던진 폭탄은 더 큰 폭탄이 되어 나를 향해 날아온다.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모르지 않는가. 아는 게 적으니 상대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고를 수가 없다. 그저 내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그 결과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인생이 원래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마주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한 방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핵탄두 미사일 같은 수치심 말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인정할 줄 알고 또 뉘우치며 구성원을 배척하지 않고 결국은 끌어안을 수 있는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고 싶다. 내 잘난 모습을 너는 ‘구경이나 하고 박수나 쳐 달라’는 식의 마주침이 아니라 서툴게 준비한 나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건네는 시간을 공유하고 ‘당신과 맞추어 가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 끈적한 숨결을 함께하는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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