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 근무와 마켓컬리 등급의 상관 관계
2020년부터 1년 남짓 다닌 회사는 사무실로 출근한 날보다 출근하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당시 COVID-19가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까닭인데, 생전 처음 해 보는 장기간 재택 근무 덕분에 회사를 실제보다 더 좋게 기억하고 있다. 집밥 판타지는 없지만 회사 근처의 죄 비싸고 맛없는, 선택의 폭조차 넓지 않은 식당들에 질려 있었던 터라 재택 기간에는 그날그날의 욕망에 따라 맛있고 좋은 것만 먹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했다. 그리하여 눈을 돌린 것이 마켓컬리다. 나가 일하는 시간이 길고 요리는 안 하는데 하루에 한 번은 좋은 걸 먹고 싶은 편리한 양심의 소유자에게 이 서비스는 구원자다. 생명의 은인이다. 요새는 SSG에서도 쿠팡에서도 장을 보면 24시간 내 배송이란 것을 해주지만 컬리의 상품 큐레이션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갑자기 내일 라임 모히또를 해 먹어야겠는데 밤 10시에 애플민트와 라임을 구할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라임 모히또 말고도 평소 막연하게 ‘이렇게 먹고 싶다…’ 한 것을 재택 근무 첫 달 내내 차려먹었다. 그랬더니 어느날 이렇게 메시지가 왔다.
[2020년 xx월 등급 변경 안내] 이번 달 등급: [라벤더]
‘그렇군, 등급이 바뀌었군! 내가 가입된 백 개의 쇼핑몰에서는 어지간히 사지 않으면 등급 업그레이드가 안 되던데, 여기는 인심이 후하네?’ 하고 흐뭇해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현실 감각이 문득 찾아왔다. 라벤더 등급은 지난달 실적이 50만 원을 넘은 유저에게 부여된다. 그러니까 나 혼자서 마켓컬리에만 50만 원 넘는 돈을 쓴 것이다. 납득이 안 가 계산을 해봤다. 배송료를 아끼려고—아낀 것이 아니지만은— 4만 원 대에 맞춰 주문했는데 그것을 2-3일에 한 번씩 해댔으면… 내가 저지른 일이 맞았다. 여기서만 사 먹은 것도 아니니 엥겔 지수가 치솟았다. 그래서 도대체 뭘 사 먹었는가? 1인 가구 세대주가 컬리에서 뭘 시켜 먹는지 궁금한 분도 계실 것이다. 그래서 공개한다. 다음과 같은 것을 먹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식생활은 서구의 것이 좋았다. 식빵은 종류별로, 베이컨, 아스파라거스, 계란, 치즈, 수프 따위를 줄기차게 시켜 먹었는데 여즉도 질리지 않는다. 또 백반집에서 한두 개는 손이 안 가는 반찬이 꼭 있는데 전부 내가 좋아하는 찬으로만 차려 먹는 호사를 누리니 좋았다. 옛날 한국 드라마를 보면 가부장들이 저 좋아하는 것으로만 밥상 구성이 되지 않았다고 상을 뒤엎고 페익을 부리는 장면이 있잖아, 과연 최애 음식만 실컷 먹는 건 가장만이 누리는 특권인 거다. 물론 나는 먹고 싶은 건 직접 구해다 먹는 성숙한 시민으로, 패악을 부려봐야 받아줄 사람도 없어서 가부장들보다는 한결 문명화된 식사를 한다.
대학교 때 조금 이르게 생활 전선에 내몰렸었다. 학자금은 대출 받고 생활비는 벌어 썼는데, 이 생활비에는 월세도 식비도 포함됐다. 이 무렵 나는 물심양면으로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즘은 ‘월 20만원으로 먹고살기’ 같은 챌린지도 있는 모양이지만, 챌린지가 아니라 생활이 되면 그것은 아무런 성취감도 주지 않는다. 이번 달에 20만원으로 겨우 먹고살았는데 다음 달도 20만 원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던 고시원에는 취사 장비조차 없었다. 쌀을 지원받는 것도 아니고, 식비에 월 20만 원밖에 쓰지 못하더라도 매끼 라면만 먹을 수 없는 사람이어서 시리얼과 빵을 많이도 사 먹었다. 직장이 구해지고 나서는 학자금을 상환해야 했으니 생활 수준이 아주 약간 나아진 정도였다. 월급날엔 특히 비싸고 맛있는 걸 사 먹는, 빈티 나는 습관은 그 시절의 잔재다. 앞으로 몇 년 더 월급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 좀처럼 버려지지 않는 습관이다.
사람이 경험에서 반드시 배우는 것도 아니고, 배우더라도 그게 모두 같은 배움이라는 법도 없다. 젊은 날의 생활고가 남긴 흔적을 승화시켜 야무지게 생활을 꾸려 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있다. 내 생활이 칠칠치 못하다기보다는 씀씀이가 그런 편이다. 라벤더 등급의 진실을 깨닫고 나는 “와, 짱이다.” 하고 입밖에 내어 말했다. 근 20년 전의 빈약한 식사가 새삼 뇌리를 스친 것은 아니었다. 식비를 더 쓴다고 더 성공적인 삶도 아니거니와, 아마 라벤더 등급은 나 같은 자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도 형성돼 있는 것으로 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주거광열비를 훌쩍 뛰어넘는 돈을 오로지 한곳에서만, 그것도 그로서리 쇼핑에만 썼다는 사실이 몹시 가슴 설렜다. 저걸 먹겠다고 마켓컬리에 한 달에 50만 원을 썼어, 와, 짱이다. 계란은 하얀 게 예쁘니까 더 비싸도 하얀 걸 사고, 안 남는 게 양 많은 것보다 중요하니까 결과적으로 중량당 가격이 더 높은 걸 사는 사람의 생각은 여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한다.
동시에 재택 근무의 장기적 생산성에 대해서도, ’집밥’의 생산성에 대해서도 반추할 겨를이 있었다. 너무 있어서 탈이었다. 수개월에 걸친 재택은 운동 부족과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를 동반했다. 반조리 식품을 그저 데워 상을 차릴 뿐인데도 준비하고 치우는 시간이 먹는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입은 맛있는 것만 찾지, 몸은 편한 것만 찾지, 때 되면 음식을 보충해서 그저 소모할 뿐인 인체의 메커니즘에도 엷은 환멸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아무튼 라벤더 등급만은 짱이었다. 막 오븐에서 꺼낸, 두껍게 썬 식빵에 에쉬레 버터와 무슨무슨 프랑스 잼을 잔뜩 발라 먹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렇게 먹은 것도 짱이었다. 무엇보다 짱인 것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는 거다. 이후로 우리 집 식비는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다. 그 얘기는 언젠가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