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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Feb 19. 2022

食. 찻잎을 샀더니 이사를 가고 싶다

주왕의 젓가락과 소공녀의 인형

다도에 관하여서는 아는 바가 없다. 다만 내게 가을겨울에 발효차를 마시고 봄여름에 녹차를 마시는 차 취향이 있을 뿐이다. 연말 디저트 시즌, 먹을 케이크가 두 조각 이상이면 커피 한 잔으로는 부족하니 그때에는 한 팟 넉넉히 우려먹을 수 있는 홍차를 선호하면서부터 이 취향이 굳어졌다. 녹차는 교토 우지산 교쿠로가 좋은데 물 온도나 양을 세심히 맞춰서까지 내려 먹지는 않는다. 다구도 일본 사이트에서 하나씩 구한 규스와 찻잔이 전부였다. 본디 차보다 커피를 월등히 많이 마시기도 하거니와, 이래 봬도 일에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쏟다 보니 중국차나 대만차의 세계에까지 관심이 뻗어나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내 명창정궤의 로망을 유사 체험할 수 있는 찻집에 다니기 전까지는 그랬다.


처음에는 다구를 참 예쁘게도 세팅해 주신다고 감탄했을 뿐이다. 다도에 관해 아는 바 없는 일반인의 생각으로는, 티타임의 주인공은 모름지기 차가 되어야 하는데 다구에 자꾸만 눈이 갔다. ‘어차피 찻집에 자주 들르고, 곧 갓 수확한 녹차를 구할 수 있을 테니 중국차용 다구를 풀 세트로 갖출 일은 없겠지’ 했을 때 이미 한편에서는 딴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규스도 다관은 다관이니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청차를 집에서도 마셔 보자—가 모든 사태의 시작이었다. 차 가격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것을 50그램 사 들고 와서, 어쩐지 이미 마련되어 있던 다하까지 그럴싸하게 놓아 봤지만 아무래도 이것은 좀 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말하지만 나는 다도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커피 포트에 티백을 우려 마시든 백자 다완에 커피를 내려 마시든 ‘용기에 음료를 담아 먹는다’라는 행위의 본질을 해치는 것이 아니니 남이 그리한대도 아무려면 어떠냐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에 맞는 다관을 갖고 싶었다. 찻집에 갈 때마다 예쁘게 차려져 나오는 바로 그 세트를 집에도 갖춰놓고 나도 쓰고 손님이 오면 내놓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본데없는 티타임. 청차를 마시는데 차통과 찻주전자는 (일본) 녹차용이고 컵도 청차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상나라 주왕은 달기를 위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게 했다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신하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면 그에 맞는 옥 그릇을 원하게 될 것이고, 그 그릇에 산해진미를 담아 먹고 싶어질 것이며, 그러한 상차림에 맞는 사치스러운 의관을 짓고 이 모든 것이 들어갈 으리으리한 대궐을 세워 끝내는 국고를 탕진하고 만백성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라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찻집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만듦새가 범상치 않은 다관을 찾아 헤매며 나는 내가 이미 상아 젓가락이 불러온 망국의 테크트리를 탔음을 직감했다. 도예가가 빚는 자기 다관은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크기가 맞지 않았고, 크기도 가격도 적절한 것은 아주 작은 디테일 하나가 거슬렸다. 어렵사리 이거다 싶은 걸 찾으면 품절된 지 오래였다. 다니는 찻집에서도 전시해 놓고 파는 작품이 몇 점 있는데 작품이다 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다관 사진을 500개쯤 보는 동안 눈은 점점 높아졌고, 그걸 내 집으로 가져온다 상상하니 아무래도 새 쟁반과 찻잔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쯤에서 상저옥배象著玉杯의 교훈을 내가 되새겼다면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가격이 만만치 않은 찻집의 작품들 중에서도 제일 만만치 않은 것을 골랐으니까. 세차를 할 때마다 싱크대로 뛰어갈 수 없어 어울리는 숙우도 하나 샀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두 개 다관 중 결국 마음을 정하게 만든, 그에 어울리는 호두나무 쟁반도 비교적 최근에 주문한 것이다.


쟁반을 기다리며 식탁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식탁도 그 쟁반에 어울리는 원목으로 바꿨으면 좋겠는데.” 식탁은 1인 가구의 분수에 걸맞은 중저가 브랜드 제품으로, 주방에 짜 올린 이케아 선반과 색을 맞췄다. 식탁을 바꾸면 그 선반도 바꿔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이사가 가고 싶겠지. 상아 젓가락 아니라 청차 한 잔도 1인 가구에는 이렇게 위험하다. 잘못은 젓가락이나 찻잎이 아니라 인간의 허영에 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하다 감당 못 할 선을 넘어버리는 어리석음에 있다.


실은 나는 이 ‘분수’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게까지 하면 사치지’라고, 사회적으로 막연하게 형성된 암묵적 선이 있는 모양인데 그 수위가 사람마다 달라 지키기 어렵다. 재테크 전문가들이 ‘집을 사고 싶다면 수입의 얼마는 저축하고 얼마는 투자하라’라고 하듯이 분수의 수위도 명료하게 정해주면 좋겠다. 또 설령 분수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가진 것보다 많이 쓰면 마이너스가 된다’는 당연한 인과율이 실현된 것뿐이다. 건전한 경제 관념을 개인의 도덕성과 일치시키는 사고는 나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는다. 주왕은 자기 돈이 아니라 나랏돈을 상아 젓가락에 썼으니, 탐욕보다는 횡령의 혐의가 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조장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도리어 아름답게 포장한 이야기도 있다. O. 헨리의 「동방 박사의 선물」은 빈곤한 주제에 맞지 않는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앤티크 시계를 각각 금 시계줄과 보석 머리빗—분수에 넘칠뿐더러 쓸모까지 없어진—으로 맞바꾼 어리석은 부부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왕의 상저옥배가 잘못이라면 짐과 델라의 선물도 잘못인데, O. 헨리 작품 중 가장 빈티 나는 이 이야기는 어쩐지 주왕의 고사와는 사뭇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가난한 주제에 맞지 않는 귀한 물건을 가까이 두고 애지중지하며 이를 위안 삼는 이야기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소공녀』다. 원제 A Little Princess보다 어감이 훨씬 근사한 제목에 홀려 어렸을 적 수십 번은 읽었는데, 교육받을 권리도 기숙사 독방도 예쁜 드레스도 전부 빼앗긴 비운의 소공녀 세라 곁에 유일하게 남은 자산—인형 에밀리의 삽화가 또 너무 근사했었다. 물이 새고 쥐가 나오는 다락방과, 그 방에서 추위에 떨고 슬픔에 울면서 보냈을 소공녀의 밤들을 에밀리의 존재가 밝혀주었을 생각을 하면 나의 마음도 덩달아 밝아지곤 했다. 예쁜 것, 귀한 것,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값비쌀 수밖에 없는 것이 가져오는 기쁨과 위안에 대해서도 그때부터 확신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소공녀의 가난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소공녀의 부는 인도와 아프리카를 착취해 얻어진 것이긴 하였지만은…)


귀한 것의 가치를 알아보고 아끼며 그걸로 삶의 활력을 얻는 소공녀의 마음은 어느 시점부터 주왕의 탐욕이 되는가. ‘개인의 욕망이 그의 자제력을 넘어서는 시점’이라는 것이 통념이겠으나, 욕망이 자제력을 넘어선다 하더라도 실현할 여력이 없으면 이는 좌절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실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상아 젓가락을 만들게 한 주왕의 권력이 문제 아닌가. 한 사람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몰아준 상나라의 정치 체제가 문제 아닌가. 상아 젓가락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옥으로 빚은 아름다운 그릇이 문제 아닌가. 그중 무엇에 책임이 있더라도, 나는 주왕보다 가난한 소공녀에 가까운 처지라 나의 소박한 찻상을 이 덕화 앤티크 다관으로 장식하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역시 내게도 권력과 경제력을 달라. 아니면 새 쟁반에 어울리는 앤티크 테이블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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