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과 악행을 전화위복 삼아 11,000원을 이꼈다
최근에 나는 작은 불운과 큰 악행을 나의 플러스(+) 기회로 탈바꿈시키는 시도를 했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캡슐 커피를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발단은 P모사가 피고용인을 상대로 저지른 부당행위였다. 전말을 파악하고 나는 더 이상 역 근처 베이커리에서 커피를 사지 않기로 했다. 큰 악행을 피하니 작은 불운이 닥쳐왔다. 역과 회사 사이에 가로놓인 도보 10분 남짓한 거리에 커피숍만 예닐곱 개인데 그중 내 예산 내에서 취향에 맞는 원두를 제공하는 곳이 한 곳도 없었던 것이다. 커피 애호가로서의 확고한 기준을 대폭 낮춰 카페인 중독자로서의 최소 조건만 적용했는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몇 년째 ‘우리집에서 가장 활용도 높은 가전 BEST 3’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일리 y3.3이 또다시 활약할 때였다.
일리 y3.3은 실로 훌륭히 제 역할을 수행 중이다. 귀찮아진 것은 나뿐이다. 얼음을 얼리고 텀블러를 씻는 데 전에 안 쓰던 시간을 쓰게 됐는데, 퇴근해서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비참한 기분이 들고 아침까지 내버려뒀다 하면 울적해진다. 나는 소위 ‘알파걸’ 1세대로 ‘여자는 집안일이나 하라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상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입받으며 자란 동시에, 어엿한 1인 가구 세대주로서 ‘자기가 먹은 것도 스스로 못 치우는 인간이 무엇을 제대로 해내겠는가’라는 가치관의 소유자인 까닭이다.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생활의 편의에 버릇을 망쳐도 단단히 망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울면서 전화하면 한달음에든 못 이긴 척이든 와서 그 일을 대신해줄 사람을 주위에 두지 않은 덕분에 여기서 더 인간으로서 타락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비참하거나 울적한 만큼 커피값이 줄기는 하였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면 이 동네 물가로는 못 해도 2,800원은 나가는데 캡슐 세 알은 그것보단 저렴하니 아마도 커피값을 아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가계부를 열어보고 다소 놀랐다. 커피값은 획기적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캡슐 커피는 경제적이니까 사 마셨다면 더블 샷을 넣었을 커피에 슬쩍 트리플 샷을 넣은 탓이 클 것이다… 아마도.
특정 세대, 특정 성별이 특정 커피 브랜드를 소비하는 현상이 전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았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안다. 사람마다 경제 관념과 주머니 사정이 다른데도 ‘커피 같은 기호 식품에는 월 얼마 이상을 지출하면 안 된다’는, 나만 모르는 어떤 기준이 존재하나 보다. 아무튼 나는 그 기준을 모르니까 부끄러움 없이 나의 월별 커피&차 지출 내역을 공개하겠다. 24시간마다 커피를 섭취하지 않으면 머리를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두통을 겪는 카페인 중독자로서 1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금, 토요일엔 (다음날이 쉬는 날이니까) 커피를 두 잔씩 마시고 주말에는 핸드드립을 직접 내리거나, 동네 커피숍에서 남이 만들어주는 커피를 산다.
어… 이 지출에는 커피&차 도구, 커피 기기, 커피잔, 찻잔을 산 내역도 다 포함되어 있다. 지난달 커피값이 115,270원, 본격적으로 캡슐 커피를 싸 갖고 다니기 시작한 게 7월이니 11,000원 정도가 절약되었다. (그래도 절약을 하기는 했다.) 2022년 상반기엔 도대체 무엇을 했나? 일주일에 한 번씩 중국차를 마시러 가서 거의 매번 두 주전자를 주문하고 빈티지 차호(이것)와 중국차와 프리미엄 고쿠로 찻잎을 손에 넣었지…. 2021년 4분기에는 연말 모임을 계획하느라 커피잔을 좀 사들였다. 손님들이 무척 즐거워했으니 그만한 보람은 있었다.
커피값은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했지만 일회용품은 확실히 덜 쓰게 되었으니 환경에는 기여한 것이다—라고 하기에는, 버려지는 캡슐도 죄 플라스틱이다. 환경적으로 덜 유해한 방법은 핸드드립이나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려먹는 법 정도일 텐데, 도구 일습을 다 갖추었음에도 이쪽이 더 경제적인 옵션은 절대 아니다. 2021년 2분기와 2020년 하반기에 그래프가 유독 치솟은 달은 재택 근무를 한 달이었다—교통비를 아끼게 됐다는 명분으로 오만 가지 커피 원두를 사들여 핸드드립을 연습한 시기다. 그 덕분에 꽤 맛있는 커피를 내릴 줄 알게 됐으니 돈값은 한 셈이다. 그럼 바람직하게도 커피값에 4만원에서 6만원을 쓴 달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회의가 많아서 남이 사주는 커피를 많이 마셨다. 삶의 질은 그리 좋았다고 할 수 없는 시기다.
실은 위 지출 중 어느 것도 괜한 돈을 썼다고 여기지 않는다. 커피는 언제나 커피 한 잔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일에 집중을 못 하거나 먼 미래에 치매에 걸리는 것보다는 커피값에 월 20만원을 쓰는 게 낫지 않나. 두어 시간 창밖이나 멍하니 보며 사색할 여유를 5천 원에 살 수 있어서 다행 아닌가. 나는 식비를 아끼려 허리띠를 졸라맨 적은 있어도 커피값을 아끼는 게 지상 목표가 된 적은 없다. 비용보다는 맛과 준비 시간이 중요한데, 이제 여기에 환경적 영향이라는 기준도 추가됐다. 생각해봤는데 비용, 맛, 시간, 환경—네 가지 조건을 다 충족하는 커피를 마시려면 근로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대인이 돈을 아끼고 취향을 지키면서 환경까지 보호할 시간이 없는 게 문제다. 거기다 나만 모르는 암묵적 기준을 벗어나면 사치스럽다고, 환경오염의 주범이라고, 입맛이 비싼 척한다고(척하는 게 아니라 비싼 게 맛있는 걸 어쩌겠는가) 욕까지 먹는다. 그 와중에 누구는 코인을 채굴하고 먹방을 소비하고 가뭄의 시대에 물 쇼에 가고 아이돌 CD를 수백 장 사서 투기하는데, 조만간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로 커피 생산도 여의치 않아질 것이라 하니 내 생애에서 커피를 더 누리지 못하게 되기 이전에 힘 닿는 데까지 커피를 마시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