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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Jan 02. 2024

아방수가 이기는 세계관

그 들라크루아가 그 들라크루아인 줄 알았지

매거진 ≪무대책 퇴사자의 30일 생존기≫는 무대책 퇴사 후, 커리어 계획 혹은 무계획적 일상에 관해 30일간 쓰는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방학 시즌이 되면 수도권의 큰 미술관에서는 제법 굵직한 전시회가 열리곤 한다. 하여 12월초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미셸 들라크루아, 파리의 벨 에포크≫ 전시를 한다기에 옳거니 하고 얼리버드로 예약을 했다. 백수라 평일 오후에 당당히 방문했건만 관람객이 워낙 많아 근 20여분을 기다린 뒤에야 간신히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 안내를 받으면서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들라크루아 하면 이거잖아, 이거.


출처: https://histoire-image.org/etudes/liberte-guidant-peuple-eugene-delacroix


나는 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는데, 미술사에서의 낭만주의와 벨 에포크가 다른 시기라는 것을 알 정도의 상식은 여전히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들라크루아가 그 들라크루아가 아니란 것을, 나는 첫 전시실에 들어설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아. 화풍이 다르잖아, 화풍이.”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인간의 선입견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관성이란 무서운 것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길에 버젓이 자동차가 다니니 아무리 해도 1900년대쯤은 되어 보이는데 어쩐지 “1900년대의 사람이라고 해서 프랑스 혁명을 못 그릴 건 없잖아.” 같은 변명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다음 전시실로 가면 갑자기 화풍이 바뀌는 것이 아닐까? 같은 기대를 하면서. 


출처: https://www.sac.or.kr/site/main/show/show_view?SN=49107


하지만 1전시실에서 2전시실로, 3전시실로 건너가면서도 들라크루아 씨의 화풍의 급작스러운 변화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파리지앵의 근사한 삶, 파리의 연인들, 파리의 겨울, 파리의 크리스마스, … 이렇게 평생에 걸쳐 예찬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도시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200여 점의 아름다운 그림들 사이를 거닐며 나는 ‘하지만… 민중의 여신… 어디 있는 건데’ 라고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저 너머에 출구가 보이는 마지막 전시실에 이르러서야 나는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렸다. 


혹시… 이 들라크루아가 그 들라크루아가 아닌 거 아님? 
(직접 촬영한 사진)


물론 이 들라크루아가 그 들라크루아가 아니었다. 당연하지 않나. 이분은 지금도 건강하게 예술 활동을 하고 계시는 미셸 들라크루아 씨이고, 저 유명한 민중의 여신을 그린 화가는 외젠 들라크루아다. 

조사해 보니 들라크루아는 사실 그렇게 흔해빠진 성은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프랑스에서 들라크루아 성씨를 쓰는 가문이 저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씨를 배출한 가문뿐일 리는 없다. 들라크루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 한국에서 전시회가 열릴 정도로 저명한 화가가 둘 이상이라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그저 이것은 ‘한가람 미술관에서 겨울방학 시즌에 큰 전시회를 연다니까 당연히 그 들라크루아겠지’ 라고 생각해 버린 나의 경솔함과 무지의 소산일 따름이다.


출처: https://mondonomo.ai/surname/delacroix


그리하여 내가 정신 안 차려놓고 미셸 들라크루아 씨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냐면 전혀 아니었다. 전시회는 즐거웠고, 크리스마스를 일주일쯤 앞둔 시기였기에 그 주제를 다룬 전시실에서는 특히 떠나지 못하고 몇몇 그림 앞을 서성였다. 크리스마스에 호두까기 인형의 주인공 소녀 마리나, 뭐 그런 행복한 아이보다 성냥팔이 소녀, 미스터 스크루지에게 더 이입이 잘되는 것은 틀림없이 내가 백수여서겠지. 그러나 차갑게 젖은 신발을 신고 펄펄 내리는 눈과 얼어붙은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방 안을 들여다볼 때에만 느껴지는 어떤 정서가 있다. 그것을 느껴 본 사람만이 누군가 문 밖에 선 내게 문을 열어 줄 때 진정으로 환대받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나는 본래 계획적이고(화가의 성만 보고 착각하여 엉뚱한 실수를 했으나 얼리버드 표를 예매할 정도로는 계획적이다) 일단 세워 놓은 계획에 있어서는 다소 융통성이 없는 편이다. 예외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예외조차 나의 예상 안에 들어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계획 밖에 있으므로 덤으로 얻는 것은 원치 않으며(衣. 완성형 멋쟁이의 미니멀리즘 판타지), 이런 타입일수록 불시에 찾아오는 행운을 만끽하기 어렵다는 것이야 널리 알려진 사실이리라. 


그러나 때로는 세상을 ‘아방수’처럼 사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리디북스(https://ridibooks.com/blog/glossary/11)가 정의하는 아방수란 다음과 같다.


아방수란?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수 캐릭터이라는 뜻으로,
비슷한 의미로 순진수라고 부르기도 해요!


이밖에도 여초 커뮤니티에서 밈처럼 쓰이는 ‘아방수’에는 어리바리 쪽에 강하게 방점이 찍힌다. 어느 정도로 어리바리하냐면, 상대방의 악의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둔감함과 무던함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사이에 있는 캐릭터다. 누군가 자기를 골탕먹이려다 역으로 골탕먹고 이쪽에는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상대방에게 활짝 웃으며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게 아방수다. 역시나 밈으로 쓰이는 ‘아방수가 이기는 세계관’이라는 말에는, 세상의 악의나 풍파 따위 일일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행운이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아가는 자세의 필요성이 내재되어 있다. 


이 들라크루아가 그 들라크루아인 줄 알고 갔다가 결과적으로 희망과 행복감에 부푼 가슴을 안고 미술관을 나선 그날의 나는 ‘아방수가 이기는 세계관’을 새삼 실감했다. 그날 할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의 결과를 예상하고, 그 결과를 기반으로 또다시 다음날의 계획을 세우며 하루하루 기대되는 바가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남 없는, 그리하여 성실하게 목표를 달성해 가는 삶이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때로는 예외와 일탈과 무계획이 끼어들 여지를 두어야 한다. 내가 통제 가능한 바운더리 안에서 통제 가능한 요소들을 통제하는 데만 몰두하면 생활과 관점은 필연적으로 수렴된다. 내향적이기 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글을 쓰고, 정기적으로 (마음속 깊이 괴로워하면서) 낯선 자들의 모임에 나가고 하는 것은 다 그 여지를 넓히기 위한 노력이다.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팔을 뻗으면 그 거리 안에, 내 손이 닿는 곳에 뜻밖의 행운이 있다. 


그건 그렇고 아방수와 ‘넌씨눈’은 종이 한장 차이다. 나는 스스로를 아방수라고 일컫는 사람이 진짜로 아방수 캐릭터인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그 단어로 본인을 수식하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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