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해드림 hd books Nov 28. 2025
가을이 되면 마음이 허무해질 만큼 나는 겨울을 싫어한다.
저 찬란한 빛깔 뒤편,
스멀거리는 겨울을 생각하면 가을 서정이 아프다.
50여 년 도회지 생활을 하면서도 겨울을 즐기는 일은 고사하고
겨울 정취조차 느껴볼 여유가 없었다.
살갗을 태우며 땡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겨울을 생각하면 더운 줄을 몰랐다.
다만, 시골집에서 겨울은 다르다.
사계 중 가장 맑게 빛나는 밤하늘 별들은
세속의 사념이 파고 들 틈새를 없애버린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궁이의 장작불 앞에서 불멍(?)하며
군불을 때는 겨울 정취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밤새 스며든 냉기를 몰아내며
집을 데우는 아침 햇살이 겨울을 여유롭게 한다.
이때 시골집 작은 마루는 현관문을 닫으면 온실이 된다.
개나리나 진달래 가지를 꺾어 물병에 담가두면
금세 꽃이 피어날 만큼 따뜻한 공간이다.
어머니는 아침 식사 후 이 공간에서
오전 햇살을 만끽하며 고요히 사경(寫經)을 한다.
마루에는 항상 어머니의 사경 책상이 놓어있다.
무릎이 약하시니 다리를 쭉 뻗은 채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불경을 베껴 쓴다.
노트 옆에는 화이트를 두고
잘못 쓴 글자는 꼼꼼히 수정해 가며 쓴다.
어머니의 글씨가 부처님 앞 제자들처럼 공손하다.
93세 어머니의 사경하는 모습은
아들인 내가 봐도 존경스럽다.
어머니가 언제부터 사경을 하셨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1996년인가, 제주 약천사 완공식 때
한 보따리의 사경 노트를 부처님께 봉헌하였던 기억이 있다.
수십 년 서울에서 사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두 자식을 잃은 후 시골로 내려오면서
사경은 일상이 되었지 싶다.
사경을 하며 천붕지괴의 가슴을 달래고
먼저 떠난 자식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이다.
어머니가 햇살을 즐기며 사경하는 마루에는
부처님의 따스한 자비가 흐르고
어머니를 바라보는 내 가슴에는 하느님의 은혜가 흐른다.
어머니는 수십 권 사경 노트를 보자기로 싸서
보물단지처럼 장롱 속에 두셨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작년 여름, MBN 휴면다큐 [사노라면]을 촬영할 때
PD가 묻지도 않았는데
보자기를 풀어 사경 노트를 펼쳐보였다.
어머니는 노트며 필기도구를 직접 구하신다.
당신이 즐겨쓰는 펜도 있는데
문구점에서 구할 수 없을 때만 내게 구해달라고 부탁하신다.
타고난 부분도 있겠으나
93세 어머니의 총기(聰氣)는
사경을 하면서 흐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글로 풀어쓴 법문도 있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 불경을
어쩌면 저리도 오랜 세월 써오실까….
어머니의 집중력이나 집념의 DNA는
아쉽게도 내게 유전되지 않았다.
93세에도 버리지 못하는
자존심의 DNA를 물려받았을 뿐이다.
어머니처럼 손글씨(肉筆)를 꾸준히 쓰면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 세대 어머니가 대부분 모진 고생을 하셨듯이,
서른아홉 살 때 홀로된 내 어머니도
온갖 정신적 육체적 질곡을 겪으며 살아오셨다.
정신이 파탄날 수도 있었던 세월을 담고서도
93세가 되도록 온전한 정신을 지탱할 수 있었던 데는
사경 덕분이 아닌가 한다.
손글씨는 속도가 느리고 리듬이 일정해서
마음을 가다듬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쓰는 사경은
정서적 안정을 가져와
뇌 건강 유지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지 싶다.
이것은 어머니가 혼자 지내도
외로움을 모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외로움은
나의 걱정이 만들어 낸 외로움일 것이다.
어머니처럼 사경은 아니지만
나도 육필 메모를 자주하는 편이다.
그것은 내 시집 덕분이기도 하다.
내 시집을 만들 때, 어차피 안 팔릴 시집
다이어리 시집으로 만들어
평생 메모 노트라도 쓰자 하였기 때문이다.
안 팔리는 책, 폐기처분 하는 것보다야 백번 나은 일이고
어머니도 내 시집을 메모 노트로 활용하기도 한다.
사경을 하는 어머니를 보면 엉뚱한 생각도 든다.
만일 어머니가 30여 년 동안 시집 필사를 해왔다면
지금쯤 유명한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조만간 어머니께 내려가면
시 쓰는 법을 알려드리고
시도 써보시라고 권유해볼 참이다.
근데 여태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하였을까.
봄이면 마당가 울타리에는 개나리가 지천인데
가지를 꺾어다
어머니 온실 속에서 피어나게 할 생각을….
#93세우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