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
우리 모두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주제가 아닐까?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고뇌는 인류가 성찰하는 능력을 갖춘 이래 수 세기를 거쳐 전해온 과제이자, 앞으로도 지속될 물음일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룰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는 작품을 통해 저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다운 삶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 수용소의 삶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해,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힌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인간다움의 조건을 찾을 수 있을까?
1) 인간다움의 시작 : '생각'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을 쉴 새 없이 하며 살아간다.
그 생각은 때로는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하는 단순한 것부터, '나라는 사람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면 좋을까', '올해의 큰 계획을 좀 변경해 볼까?'와 같은 다소 복잡하고 추상적인 것까지 범위와 종류가 다양하다.
생각의 범위가 확장되고 복잡해진다는 것은 인간다움과 성장의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생존에 집중되어 있던 욕구와 생각이 소속감이나 자아실현과 같은 소위 인간다움에 대한 욕구로 발전해 나가는 것은 인간 성장의 과정이자,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요인이 되어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욕구의 충족을 통해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높은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미래에 대한 고민', '자기 계발'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나의 집이 아닌 수용소와 같은 곳이라면.
2년 뒤, 5년 뒤에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죄수들은 생각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 생각이라는 것이 언제나 제자리에서 뱅뱅 돌게 마련이다.
누군가 매트 속에 감춰둔 빵조각을 뒤지지는 않을까? 저녁에 의무실에 가서 작업 면제를 받을 방법이 없을까?
...
체자리는 도대체 어디서 그 하얗고 포근한 셔츠를 손에 넣었을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속에서 수용소의 죄수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생존'에 대한 강력한 욕구이다.
오늘은 배를 곯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무사히 잠이 들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욕구가 모든 생각을 집어삼킨 상황에서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 따위는 없고, 시간의 반복 속에 생각의 매몰은 더욱 깊어진다.
작품 속에서 '뱅뱅 돈다'라고 표현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생각의 확장을 통해 인간다움을 추구하고, 생각의 자유를 통해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간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환경은 생각을 확장해 나갈 자유와 기회를 제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다움에 대한 보다 고차원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에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그를 위해서 모든 문제를 간수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작품 속 구절은 일면 참담한 기분까지 느끼게 한다.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절망 속에 생각의 부재가 '마음 편함'으로 다가오게 되는 상황.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생각하지 않는 편안함'은 나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포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언뜻 <멋진 신세계> 속 '소마'를 이용해 생각과 걱정에서 도피하고, 마음 편한 삶을 사는 세계국 구성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생각의 자유를 박탈당한, 그것을 마음 편하다고 느끼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수용자들, 그리고 <멋진 신세계>의 세계국 구성원들의 모습은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었음에도 그조차 느끼지 못하는 슬픔과 참혹함을 보여준다.
'생각하지 않는 것'.
많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사는 삶을 원하고, 동경하는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인생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며, 생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 작품들에서 바라본 '생각하지 않는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생각 없음'은 곧 주체적이고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나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비단 수용소와 같은 특수한 환경만이 인간다움을 향한 생각의 기회를 앗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일의 생활을 이어갈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이 닥쳐온다면 당신은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아마 아래의 구절에 공감을 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같은 때는 맹물 양배춧국이라 해도 뜨뜻한 국 한 그릇이 가뭄에 단비같이 간절한 것이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단숨에 들이켜게 된다.
이 한 그릇의 양배춧국이 지금의 그들에겐 자유보다, 지금까지의 전생애보다 아니, 앞으로의 모든 삶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다움의 시작과 끝을 모두 '생각'과 '생각의 자유'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자유는 기본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다.
저자는 기본적 욕구의 부재 속에서 한없이 좁아지는 생각의 폭과 삶에 대한 시선을 저자는 작품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간다움의 기회, 생각의 자유를 앗아가는 폭력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함께 담아낸다.
2) 계급주의는 인간의 본성인가?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는가?
<파리대왕>에서는 무인도에 불시착한 아이들이 대장을 뽑고, 그들 안에서 서열을 나누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는 어떠한가?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들은 나름대로 서열을 가리고, 계급을 나눈다.
"페추코프는 반원들 중에서 슈호프보다 더 낮은 계급에 속하는 죄수다.
모두들 똑같은 검은 옷 위에 번호표를 달고 있어서 똑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만저만 다른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전직 해군 중령인 부이노프스키 같은 사람에게는 남의 밥그릇을 지키고 앉아 있으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슈호프만 하더라도 모든 일을 가리지 않고 전부 하는 것은 아니다.
슈호프보다 더 낮은 반원이 있는 까닭이다."
수용소에도 엄연히 계급이 있고, 일의 귀천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구의 강요도 아닌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뼈저린 계급의식은 우리에게 몇 가지 물음을 던진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인간의 본성은 평등을 추구하기보다는 계급에 순응하도록 타고난 것일까?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은 수용소에서 계급을 나누는 그들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유치원 아이들이 거주하는 집의 평수, 임대아파트의 여부로 서로를 평가하고 계급을 나눈다는 이야기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세상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스로 계급과 서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과 서열의 세상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완전히 사라지기 어려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에서조차 계급의 상하를 구분하고, 이러한 모습을 제대로 된 관념이 자리 잡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에게서조차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주 오랜 시간을 자리 잡아온 계급의식은 어쩌면 인간에게 '안정감'과 '질서'라는 미명하에.
때로는 같은 계급과의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친목'이라는 명분 하에 뿌리 깊은 본능으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어찌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계급의식과 구분 짓기를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임대아파트 거주민을 낮추어 이야기하는 부모님의 어투와 행동에서 아이들은 계급의식을 배우고.
수용소라는 극한의 환경은 구성원들을 계급이라는 허황된 안정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또한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계급'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는가, 혹은 강요당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쉽게 얻지 못할 답일 것이다.
3) 일한 만큼 받지 못한다면? : 자본주의는 왜 승리했는가?
이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한 가지는 바로 '대가 없는 노동'에 대한 것이다.
노동의 대가가 없을 때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해지며, 그 효율성은 얼마나 떨어지게 되는지.
기약 없이 대가 없는 노동을 해야 했던 저자는 그 경험을 처절하고도 적나라하게 작품에 투영한다.
"빵은 빵공장에나 가야 볼 수 있고, 귀리는 곡식창고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등뼈가 부서져라 하고 땅을 판다 해도, 땅에 배가 닿을 정도로 김을 맨다 해도 단 하나의 낟알도 얻을 수 없는 곳이다.
상부에서 정해 준 배급을 재외 하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곳이다.
그나마 그 규정량마저도 취사부니 개인 조수니 그리고 어영부영하면서 펜대나 놀리고 있는 놈들에게 이리 뜯기고 저리 뜯겨 정작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이란 거의 없다."
제대로 된 대가 없이 노동을 해야 할 때 사람은 무슨 감정을 느끼게 될까?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허탈함을.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쓸모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이 정도의 대가밖에 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느낄 때 인간은 의지를 잃고, 이른바 '적당함'을 추구하게 된다.
특별히 열심히 해야 할 이유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이 이른바 선진국의 대열에 오르게 된 것 또한 같은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노동, 나의 아이디어가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되는 사회.
이에 더 많은 대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기꺼이 스스로를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존재하는 사회.
그 의지가 자본주의가 세계의 주축이 되고, 수많은 혁신을 낳는 밑거름이 되어준 것이다.
반면 작품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정담함'의 추구는 우리가 보아온 공산주의 국가들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열심히 해도 돌아가는 것은 똑같으니 더 이상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사회의 발전이나 생동감 있는 경제활동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이러한 체제 하에 자행되는 것은 '서로에 의한, 서로에 대한 감시'뿐이다.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반이란 것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닌가 말이다.
똑같은 반이라도 이반에겐 이반대로, 표트르는 표트르대로 임금을 지불해 주는 그런 자유 세상에 있는 반하고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수용소에선, 상관이 감독을 하지 않아도 반원들끼리 채근을 하며 작업을 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 반이다.
반 전원이 상여 급식을 타먹게 되느냐, 아니면 배를 주리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걸린 것이다.
...
네놈 때문에 반원들이 모두 배를 곯는다는 것을 몰라? 한눈팔지 말고 빨리 일 못해! 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것이 바로 그 반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어디선가 보았을 이 이야기는 결국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노동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간의 감시는 인간성의 파괴와 갈등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수용소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가 승리하게 된 이유를, 그리고 '동기부여'라는 자본주의의 가장 큰 장점을 취하지 못한 체제가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성을 말살시키게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4) 자유와 희망의 부재는 무엇을 앗아가는가
작품 속 수용소의 모습은 자유와 희망의 부재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수용소 밖의 생활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시야는 수용소 안에서의 삶으로 좁아지고, 역설적으로 생존을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자유의 부재, 그리고 특히 '먹고살기 위한 경쟁'에 집중해야만 하는 상황은 잔인하게도 서로를 서로의 경쟁자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젠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도 없다.
모든 죄수들의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에 쏠려 있다.
저쪽을 따라잡아라! 저쪽보다 먼저 가야 한다!
...
죄수에게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옆의 죄수다.
만일 모든 죄수들이 서로 시기하지 않고 단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들에게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했다면.
생존을 위한 사투보다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나갈 기회가 있었다면 그들은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유와 희망의 결핍은 그들에게서 배려와 상호존중이라는 인간성을 앗아간다.
더불어 자유와 희망이 없는 삶은 더 큰 만족, 더 큰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 쌓기도 했다.
...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죽 한 그릇을 더 먹었음에 흡족한 삶.
영창에 갇히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삶은 과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일까?
물론 자신의 상황에서 행복을 찾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스스로를 지탱하고, 삶을 버텨나가는데 중요하다.
매일매일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어찌 살아나가겠는가?
다만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책임을 지고,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행복을 찾는 삶과 다른 선택권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만족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삶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삶 속에서 만족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는 작중 인물의 모습은 오히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절망과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이처럼 자유와 희망의 부재는 인간으로 하여금 타인을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하고,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잊게 만든다.
자유와 희망의 상실로 인한 부재들이 쌓이는 그 시간들은 결국 인간성의 상실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저자의 경험이 녹아있기에 더욱 처절하다.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수용소의 생활뿐 아니라, 그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성의 점진적 상실은 아마도 생존의 위협보다도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상실감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인간다움은 무엇보다 생각하는 힘에서 기인한다는 것.
생각하는 힘을 통해 우리는 삶의 희망을 얻고, 미래를 생각하며, 나아가 타인을 품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작품을 접하며 또 한 가지 물음을 가져본다.
'나는 나 스스로를 생각의 수용소에 가두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하자.
그리고 자유롭자.
그 자유를 통해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자.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