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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Jul 19. 2022

성폭력 2차 가해에 의한 신체적 통증

당신을 원망하지만 온전히 미워할 수 없어 더 아픕니다.

요즘 잠을 많이 잔다. 조금 과장하자면, 무슨 신생아처럼 계속 잠을 자게 된다.

밥을 먹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졸음이 쏟아져서 잠을 자게 되고, 자고 나서 잠깐 깨었다가 다시 잠들고.

그러다 보니 무슨 요일인지 감각이 둔해지고 일을 할 수도 없다.


처음에는 '내가 요 며칠 안 하던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보다', '좀 몸과 마음이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증상이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


어제 신경정신과 선생님과 요 근래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계속 졸음이 쏟아진다는 말을 하니, 우울증의 증상으로 불면증도 발생하지만, 가끔씩 반대로 계속 졸음이 쏟아지는 증상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열흘쯤 전에 일상을 나누던 분들에게 2차 가해에 대한 항의를 하고, 내가 지내던 연구실에서 모든 짐을 다 빼고 난 이후에 이런 증상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며칠 동안은 가슴 언저리가 아팠다. 가슴이 아팠다는 말은 속상했다는 말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통증이 왔다는 말이다. 지금도 좀... 어떻게 묘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가슴 정 중앙이 막 아프더라. 그렇게 밖에 말을 못 하겠다. 아마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 장면... 그런 장면에서 느끼는 통증과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내 가슴 중앙에 손을 데고 누르고 있었으니까. 통증 때문에.


그런데 불현듯 떠올랐다. 이런 통증, 살면서 한번 느껴본 적이 있다는 것을. 과거에 딱 한번.

8년간 사귀던 첫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이런 통증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저절로 내 주먹으로 내 가슴을 쾅쾅 치게 만드는 그런 고통. 그때 한번 느꼈었구나... 그리고는 지금 또 느끼고 있구나.


신경정신과 선생님의 말처럼, '엄청난 상실감'이 원인인 듯.


2차 피해의 어려움은 피해자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상실감'이 가장 큰 것 같다.

그만큼 내가 나의 동료이자 멘토였던 그분을 믿었다는 거겠지. 의지하고... 그리고 내가 몸 담고 있던 그곳을 좋아했다는 거겠지. 아직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걸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을 쌌다는 것은, 나 하나만 입 다물면, 나 하나만 빠지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편안'하게 되돌아가는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실컷 미워하기만 할 수 있으면 좀 나으려나. 거리낌 없이 마구 욕하고 침 뱉고 그럴 수 있다면 좀 나으려나.


나를 성추행한 그 사람은 사실 거의 모르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거리낌 없이 미워하고 욕하고 침 뱉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공사'를 구분하고 '거취를 결정'하라는 말을 한 2차 가해, 자신의 말이 2차 가해 인지도 모른 채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원망은 하지만 온전히 미워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지금 나는 갈 곳 없이 그저 내 작은 방에 혼자 머물러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마냥 '상실감'에 아파하며. 스트레스로  인한 과호흡으로 숨을 할딱이며.


그것이 2차 가해의 잔인함인 것 같다.

그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는 조직을 위한 '합리'와 '정의'를 바탕에 둔 채 내게 한 말이었겠지만,

내 기준으로 그 말은 '불합리'와 '불의', 그리고 비겁함이니까.

이렇게 나와 그 사람 사이에는 교집합이 있을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은 '이게 무슨 2차 가해야. 요즘은 뭐만 하면 다 가해라고 하며 입을 막아버려'라며 억울해할 것이다.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호소하는 것인데. 지금까지 그런 식의 접근으로 항상 피해자가 조직을 떠나야 했다고, 그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인데.  



날 아프게 했던 말들. '악의'없이, 혹은 심지어 '선의'를 바탕으로 한.


"그날 술 마셨어요?"

"화해하고 그러면 좋은데..."

"나는 갈등보다 화합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가해자)는 한 번도 개인적인 일을 나에게 말한 적이 없어요"

"마음 잘 추스르고 일에 집중하세요"

"이번에는 그렇게 배려해 주면 안 될까..."

"관용을 베풀면 그 사람도 언젠가는 반성할 거고..."

"스스로 반성하고 후회할 때까지 기다려주면..."

"그럼 계속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뭘 또 그렇게까지..."

"어이그..."



영화 '오늘'의 대사 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셨죠? 그 절박한 순간에도 용서를 바란건, 피해자인 예수님이 용서를 원치 않으면 하느님도 용서하실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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