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가해자에게 "일할 공간"을 내어주고... 피해자인 나에게 연구회를 나가라고 한 나의 보스, ㅇ교수님.
나에게 "마음을 잘 추스르고" 다른 일에 바쁘게 집중하라고 하시며 본인은 "갈등보다 화합"을 좋아하신다고 한 그분께, 그분의 명백한 2차 가해에 나는 '결국' 항의를 했다.
'결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망설였기 때문이다.
지난 1년 4개월 중 앞선 1년 동안, 내가 가해자를 고소하기 전까지, 나에게 진짜 잘해 주셨던 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후배가 나를 성추행한 상황을 뻔히 알면서, 자신의 연구회에 나와 가해자가 동시에 포함되었고, 내가 가해자를 연구회에서 나가게 한 사실을 아시고는,
가해자는 "연구회에 기여"할 것이 많은 사람이니, 피해자인 나에게 "개인적인 일"을 조직에 끌어들여 "조직의 운영을 방해"하지 말고, "거취를 결정"하라고 하신 분.
그분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다.
사실 항의 이메일을 작성해 놓고서는 한동안 고민을 했다. send 버튼을 클릭할 것이냐 말 것이냐.
나에게 지금까지 많은 것을 주신 만큼 앞으로는 더 많은 것을 주실 수 있는 권력이 있는 분.
반대로, 이 분의 눈 밖에 나면 혹시라도 나에게 주어질지 모를 잠재적 이익들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단순히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나의 진로에 영향을 미칠 사회적 자본까지도 포함한 잠재적 이익.
그리고, 솔직히 그런 것보다 더 고민되었던 것은 가해자의 선배이기 이전에 나의 보스였던 그분과의 인연. 감사의 마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록 경찰의 불송치에이의신청을 한 단계이지만, 그분은 내가 성추행 피해자임을 인지하시면서도,
나에게 연구회에서 나가라고 한 그분의 2차 가해 행위에 대해서 참고 모른 척하며 지나갈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면 현재의 나를, 오늘의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의 자존감, 나의 인권, 나의 정체성.
그래서 결국 send 버튼을 클릭! 항의 이메일을 보냈다.
시간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점점 더 드는 생각은, '아.. 나 잘했다. 오늘의 나를 지켰다. 내일이 오면 또 새로운 오늘의 나를 지켜야지. 그렇게 매일 오늘의, 또 다른 오늘의 나를 지키며 살아야지.'
그 분과의 관계를 도려내고, '혹시나...' 하면서 기대하게 되는 유무형의 혜택을 버리고,
난, 오늘의 나를 택했다:)
"(연구회) 회장님, 그리고 교수님,
후학으로서가 아니라 연구회의 구성원이었던 사람으로서 이메일을 보냅니다. 바쁘신데 이런 일까지 신경 쓰시게 하여 죄송하다는 말씀은 지금까지 너무 많이 한 듯하여 앞으로는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연구회를 나가게 된 정황에 대해 회장님 이하 주요 관계자분들의 의견을 여쭙니다.
아무리 미미한 구성원이었어도 이런 배경으로 조직을 나가게 된 것이라면 이 정도 질문은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 원한에서 시작된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두 분과 감히, 소모적으로 갈등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0. 조직이 발족되기 전에 발생한 성추행이라고 해도,
조직의 리더들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원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또한 피해자가 조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발전과 원만한 운영이라는 목적 하에,
가해자를 불러들여 피해자가 조직을 떠나도록 하는 것은 2차 가해에 속하는 것 아닙니까?
0.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사적"인 사건이,
가해자의 선배인 연구소 소장과 피해자인 연구원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연구소 소장이 리더로 있는 "공적" 공간인 연구회에서 결국 피해자가 배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이 "사적" 사건 이후에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은 "사적"인 것입니까 "공적"인 것입니까?
0. 또한, 가해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과,
피해자가 주변에서 도움을 얻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고 있는 것을 비교하여,
가해자는 공사 구분이 명확한 사람,
피해자는 사적인 문제로 조직의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입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는 제가 이렇게 질문을 던질 용기를 낸 것은 지금까지 1년 넘게 두 분께 쌓여왔던 인간적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제가 두 분에게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존재로 낙인이 찍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저의 고뇌를 혹시라도 이해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불편하실 수 있겠으나, 제가 제 사건을 언급하면서 피의자라는 법적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덧붙여, 교수님, 사건 인지 이후, 단 한 번이라도 피해를 호소하는 저에게, 힘들었겠다, 괜찮냐, 도와줄 건 없냐라고 관심 기울이신 적 있으십니까. 마음속으로는 신경 써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익숙지 못하신 것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에서 교수님의 성함이 자꾸 언급되는 것과 제가 교수님께 몇 차례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 짜증을 내신 것도 동시에 기억합니다. 많이 아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