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에 따르면, 학회는 "학문과 연구 종사자들이 각자의 연구 성과를 공개 발표하고 과학적인 타당성을 공개하여 검토 및 논의하는 자리이다. 동시에, 심사, 연구 발표회, 강연회, 학회지, 학술 저널 등의 연구성과 발표의 장을 제공하는 업무와 연구자 간의 교류 등의 역할도 담당 기관"이다.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규모도 크고 역사도 오래된 그 학회에는 여러 가지 연구회가 산하기관으로 존재한다. 나는 하나의 연구회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연구회가 발족할 때, 즉 단톡방의 인원이 5인일 때부터 함께 있었다. 물론 아직 학계에서는 햇병아리에 불과한 내가 연구회 발족의 주역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구회 발족을 위해 잡다한 업무부터, 책 발간 사업 및 포럼 참여 등 자잘하지만 내게 주어진 역할을 해 왔었다.
연구회가 점점 몸을 불려... 단톡방의 인원이 15인이 되었을 때, 나를 성추행한 가해자가 그 단톡방에 포함될 위기가 발생했다. 너무 싫었다. 내 폰에, 내 이메일에 그의 이름이나 흔적이 남는 것이 너무너무 너무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서 연구회 회장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회장님, 저 죄송한데요, 저 회장님한테 "저 괜찮아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근데요 그게 안돼요. 죄송합니다. 저 그 사람이랑 같은 단톡방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못하겠어요."
계획에는 없었지만 눈물을 흘리며 부탁을 했다. 회장님은 연구회의 실질적 리더인 ㅇ교수님과 어떻게 할지 상의를 하여 15인 단톡방에 가해자를 포함시키지 않으셨다. 감사했다. 조직의 리더들에게 나의 분리조치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이 분들이 중년 남성분들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감수성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감사했다.
연구회 조직이 점점 더 커져서 65명 정도가 되었다. 구성원들이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또 초대해서 이젠 서로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구성원 중 한 명이 그 가해자를 단톡방에 초대하여 포함시켰다.
지금까지 어떻게 피해왔는데... 이 공간에서 자유롭고자, 내가 어떻게, 얼마나 애써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와 나는 같은 단톡방에 포함되게 되었다. 싫었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고 불쾌감이 관자놀이를 지끈거리게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등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난 또다시 연구회 회장님에게 SOS를 쳐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난 내가 조직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비록 연구회는 회사 조직처럼 규칙이 정해져 있는 조직이 아니지만, 조직의 리더들이 가해자인 그와 피해자인 나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으니까, 이전처럼 분리조치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조직의 수가 60명이 넘어가버렸고, 이미 그가 포함되어 버렸으니... 연구회 회장님이 어떤 조치를 취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가해자를 나가게 해야겠다고, 연구회 회장님과 ㅇ교수에게 부담을 드리지 말고 나 스스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요점은 이 단톡방에서 나가 달라고. 나의 정신건강에 매우 좋지 않으니 나가 달라, 그러지 않으면 연구회 회장님에게 분리조치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만약 회장님이 곤란해하시면 나는 사건의 불기소 사유서를 업로드라도 할 것이다. 그렇게 라도 해서 난 나를 지킬 것이다. 현명하게 판단하기 바란다... 이 내용이었다. 그래 맞다. 이건 경고다. 아니 협박이다. 그런데 피해자는 거칠게 경고하고 협박하면 안되는건가? 나의 숨쉴 공간을 사수하기 위해 위협하면 안되는건가?
불기소 사유서는 내가 고소한 그의 성추행 혐의가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가 되었다는 사유서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앞의 에피소드에서 설명했지만, 그가 나에게 '동의 하'에 키스를 했다는 내용이 있고 난 그를 성추행으로 고소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공개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나의 개인적인 사고를 알지도 못하는 70명의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중년 남성들인 그 사람들의 입에 가십거리로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다가오지 마, 다가오면 죽여버릴 거야!"라는 말에서 '죽여버릴 거야'가 핵심이 아니라 '다가오지 마'가 핵심이듯이, 난 '업로드해 버릴 거야! 다가오지 마!'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는 내 이메일을 확인하고는 내게 두어 차례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으나 예전에 뭣도 모르고 그의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나서 이번에도 그의 전화겠지...라고 생각하고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하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단톡방을 스스로 나갔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두 시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이었지만 높은 긴장상태에 있던 내 온몸과 정신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영하 50도 정도의 강추위속에서 잔뜩 수축해 있던 온몸의 피부와 근육들이 따뜻한 곳에 들어가면 화끈거리며 급속도로 풀어지듯이... 내 어깨 근육, 등 근육, 허리, 다리, 팔... 머리까지 모든 부분들이 그가 단톡방을 나간 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녹아내리듯 풀어졌다.
사실 내가 긴장해 있다는 것을 몰랐었다. 단톡방에 들어온 그를 확인하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그가 내가 두어 통 전화를 하고, 그가 단톡방을 나가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난 내가 잔뜩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스르륵... 온몸이 저릿저릿하며 긴장이 풀어지더라.
나 스스로 해 냈다는 희열도 있었다. 나 스스로 내가 속한 공간에서의 내 자유를 지켜냈다는 기쁨.
그런데 그 안도감은 채 하루가 가지 않았다.
연구회의 실질적 리더, ㅇ교수가 그다음 날 오전에 내게 카톡을 보냈다.
"ㅎ박사(=나), 연구회 방에서 ㅅ박사(=가해자)가 나갔는데. 난 이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ㅅ박사(=가해자)는 연구회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해왔고 담당할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카톡을 나에게 보낸 사람은 내가 가해자에게 어떤 이메일을 보냈는지,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단톡방에서 그가 사라지자 그걸 확인하고 나에게 카톡을 보낸 것이다.
"개인적인 건 개인적으로 풀어야지요. 연구회 운영을 방해하면 되나요?"
"ㅅ박사(=가해자)는 나에게 개인적인 문제를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ㅎ박사(=나)는 지금 한창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할 사람이니 다른 준비하시고. ㅅ박사(=가해자)가 일할 공간을 내어주는 게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는 개인적으로 해결하시고 학회와 연구회는 원만하게 운영되게 해 주세요. ㅎ박사(=나)는 다른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다른 일을 준비하시고요."
나 : "교수님 이게 개인적인 일이 맞는 건가요?"
교수 : "그렇습니다"
나 : "연구회 발족 전에 일어난 일이니까 그렇습니까?"
교수: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카톡방에 뭐를 올린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 : "시기와 관련인의 구성이 애매하지만 조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 : "ㅅ박사(=가해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ㅎ박사(=나)가 거취를 결정한 후 내가 모른 체 하고 다시 ㅅ박사(=가해자)를 초대하겠습니다. 마음 잘 추스르면서 바쁘게 사십시오. ㅎ박사는 논문. 연구. 과제. 강의 준비... 할 일이 태산일 겁니다."
........(중략)........
교수: "나는 갈등보다 화합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나 : "누구나 그렇습니다. 갈등보다 화합을 좋아하지요. 저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교수님과 이런 얘기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 너무 유감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로 송구스럽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초래한 일이 아니기에 나중에 교수님께서 이런 제게 지쳐서 끝내 저를 져버리신다 해도 저는 계속 이런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연구회에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미미할 것이라 판단하셔서 제가 나가는 쪽을 제안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제가 그 연구회에 포함되었던 이유가, 아주 티끌만 한 이유였더라도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 혜택을, 기회를 포기하게 되어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교수: "일은 일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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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연구회에서 나오게 되었다. 내 손가락으로 탈퇴를 눌러 나왔지만, 내가 자발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는 건... 자명한 일이다.
나에게는 저분의 저 말들이... 유리파편처럼 내 가슴에 다닥다닥 박혀 있는 느낌이 든다.
이래서... 항상 피해자들이 조직을 떠나는구나. 떠나게 되는구나.
한 명이 자살을 하면 그건 개인의 일이지만,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유독 자살을 많이 하면 그건 사회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대책 마련을 모색하듯이,
한 명의 피해자가 조직을 떠나면 그건 개인의 일이지만,
한국사회의 대부분의 피해자가 조직을 떠난다면 그건 사회적, 조직적 일로 받아들여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성범죄는 '성'이 매개가 되었을뿐 근본적으로는 '권력'의 문제이기에...피해자보다는 가해자가 조직에 기여할 자원이 많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조직의 발전이라는 논리를 들이대면 피해자가 항상 불리한 위치에 설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