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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Jul 21. 2022

성폭력 2차 가해는 네 생각보다 훨씬, 끔찍하게 아프다

'참사'는 기록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에는 그동안 여러 참사가 있었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요.

저는 세월호 생존 학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여러 참사들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울 만큼 기록이라 할 만한 게 없었어요.

간혹 발견되는 신문기사 말고는 그 참사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by 김승섭  pp.165~166


기록하지 못한 것이, 전해지지 못한 것이, 계속되는 아픔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막을 수 있는 사고를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자기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라는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하면 이웃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으니까.


“다 죽었다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혹시 나치에 부역한 거 아니야?”,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들의 생존 과정과 치열했던 삶이 소설로, 영화로 기록되고, 전해지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현재 ‘숭고한 인간승리', '죽음을 뛰어넘은 강한 정신력', '생명 존엄성'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불어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경각심을 갖게 만드는, 반성하게 만드는 살아있는 증거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 생존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지 약 20년 정도 되었다.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로서의 피해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통과 좌절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생존해 낸 강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주변에 알리기 위함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입 다물고, 숨 죽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꾹꾹 누르면서 살아온 성폭력의 기억들은 개인에게 발생한 우연한 ‘사고’이기도 하지만,

현재 죽지 않고 생존해 있는 모든 이들의 경험을 합칠 수 있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함께 겪은 ‘참사’와도 같지 않을까?

      

참사는 기록되어야 한다. 참사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만 기록하고 말을 해야 한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웠으며 또 어떻게 고통스러웠는지, 그리고 어떻게 딛고 일어섰는지.


자세하게 기록되고 생생하게 이야기되어야 계속되는 사고들과 뒤따르는 2차 가해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옆 사람에게, 그 옆의 옆 사람에게 전해지고 공감되어야, 우리들의 다음 세대에는 그 사고들이, 그 ‘참사’가 조금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성폭력이 수치스럽게 정조를 잃은 일로 여겨지던 시대가 사실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와 결혼을 하면 죄를 묻지 않았던 시대도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성폭력은 몸가짐이 '헤픈' 여자들이나 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며, 집에 일찍 일찍 들어오는 정숙한 여인들 그런 험한 '몹쓸 짓' 당할리 없다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여행자들이 있긴 하지만.

만약 피해 생존자들이 '그게 아니라고',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자꾸 떠들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이들이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곤 했을 것이다.




오늘날 2차 가해에 대해 말이 많다. 그게 무슨 가해냐고. 그게 뭐가 아프냐고. 오버하지 말라고. 심지어 꽃뱀들의 방패라고.


모든 법, 제도에는 허점이 없을 수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법과 제도가 정교하게 짜여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사기꾼들이 존재하고, 오히려 법을 교활하게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겠지. 그런데 유독 성폭력과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한 법과 제도에 대해서는, 혹시라도 누가 악용을 하면, '그것 보라고, 이상한 법을 만들어서 사회가 이상하게 되었다고'하며 기회를 잡은 듯 비난을 한다.


법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난을 받아야 하고 법을 더욱 정교하고 현실성 있게 개정을 해야 할 일이지, 그 법에 의해 이제 겨우 보호받고, 이제 겨우 숨을 쉬게 되는 많은 생존자들을 비난할 일이 아닌데, 우리 사회는 유독 성에 관한 새로운 법과 제도에는 날을 세워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그럴수록, 더욱 경험들을 기록하고 떠들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2차 가해는 아프다고. 진짜 아프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몇 천배, 몇 만 배는 끔찍히 아프다고.


아무 문제없던 내 삶이,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렇게 뒤흔들린다고.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고, 잠을 잘 수가 없고, 과호흡으로 숨을 헐떡이고, 가슴을 치며 괴로워한다고.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는, 2차 가해에 대해 '그게 뭐냐', '문제다', '아니다' 등의 촌스러운 논란이 일어나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또 다른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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