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프하고 또 터프한 꽃 도매시장 이야기
밤 11시
남들 다 집에 들어갈 시간, 꽃일하는 사람은 주섬주섬 집을 나선다.
강남 고속터미널 꽃시장은 밤 11시부터 문을 연다. 그렇다고 해서 11시 땡 치면 꽃을 살 수 있는건 아니다.
11시는 경매가 끝난 꽃이 담긴 박스가 시장에 도착하는 시간이다.
사장님들은 박스 푸르고 꽃 진열하느라 정신 없다. 꽁꽁 싸매진 박스에 어떤 꽃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문 여는 시간에 도착하는 게 의미 없는 이유다.
밤 11시 30분
나는 새벽 꽃시장을 전쟁터라 부르고싶다.
치열하다.
꽃시장은 오후 1시까지 영업한다. 사실 아침에 일찍 나와도 된다.
그럼에도 굳이 굳이 밤에 나와 새벽에 돌아가는 이유는 좋은꽃, 사고 싶은 꽃을 사기 위함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차라리 늦게 자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꽃시장에서 "한 번 돌아보고 올게요"하고, 한 바퀴 돌고 오면 꽃 못산다.
우리 가게 기준이긴 하지만 소매 꽃집들은 꽃 한 종류당 두~세 단, 많아야 열 단 정도 산다.
반면 웨딩홀, 준도매(직매장), 구매대행 등 업체는 소매 꽃집과 달리 최소 10단부터 많게는 몇 박스 씩, 박스 단위로 꽃을 산다.
이들 업체가 남은 꽃 다 사가면 소매꽃집에게 돌아오는 기회는 없다.
내눈에 이쁘면 남들 눈에도 이쁘다. 이쁜게 보이면 빨리 사도록하자.
화장에 서툴렀던 20살,
에뛰드하우스에서 파는 아이섀도우 '새벽꽃시장'을 사서 썼었다.
그 아이섀도우 색은 참 고왔다. 수줍어보이는 파스텔 분홍.
글로 표현하기 뭐하지만 땀이란걸 흘려보지 않은 공주님 같은 색이다.
새벽꽃시장 이름 붙인 사람은 진짜 새벽에 꽃시장을 가봤을까?
실제 새벽꽃시장은 진한 와인색에 가깝다.
새벽 12시 30분
살 것 다 사고 집에 간다.
별로 많이 안샀다.
사실 우리 가게가 주로 거래하는 도매 상가는 남대문 대도상가에 위치한 꽃 도매 시장이다. 다음에는 아침을 여는 사람들을 주제로 남대문 시장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언제 가도 "윤주 왔냐"며 반갑게 맞아주시는 감사한 사장님들.
고터 꽃시장에는 워낙 많은 사람이 오가고, 우리 주 거래처도 아니기 때문에 사장님들이 친절하지는 않다. 매일 얼굴 도장 찍는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한없이 친절하겠는가.
그래도 섭섭할 때가 있는데 한 번은 한바퀴 돌아봤더니 "아까는 8,000원인데 지금은 1만 원에 사가야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또 어느날은 이거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새벽부터 꽃에 손가락질 하지 말아라"라고 소리지는 사장님도 있었다. 결국 끝까지 그 꽃의 가격을 알지 못했다. 서러웠다. 사장님 나빠요 진짜. (저 소심한 사람이에요)
새벽 1시 30분
가게 도착해서 꽃 물에 꽂아놓고, 다시 가게 문 잠그고,
집 와서 씻고 눕는 시간. 빠르면 1시 30분 늦으면 2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에뛰드 하우스 아이섀도우 그거 다 거짓말이다.
날아다니는 박스 피하랴, 끌개 피하랴, 꽃 고르랴, 짐 들고,
가끔은 막말까지 듣고 (물론 좋은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사람이 힘듦에 쩐다.
그래도 고생해서 다녀오면
손님들에게 이쁜 꽃 팔 수 있어서 뿌듯하다.
무슨 꽃이 예쁜지 눈요기해서 좋고.
우리 엄마, 이모 오랫동안 건강해서
나랑 같이 계속 시장 다녀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