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던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반신욕과 러닝, 뜨개질. 한동안은 이것들로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끔찍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내 생일 주간이 가까워지니까 어디선가 갑자기 발작버튼이 눌렸는지 다시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옷장 옆 선반에 불경과 함께 둔 사진 속 그의 눈을 마주칠 때마다 엉엉 울음이 나왔다. 룸메이트가 귀가 전이라 다행이었다. 다른 방 사람들이 놀랄까 봐 걱정도 됐지만, 울지도 않으면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 오밤중에 방바닥에 주저앉아 미친년처럼 눈물 콧물을 쏟았다.
내 안부를 크게 걱정하던 친구에게는 또 거짓말을 늘어놨다. 요즘 거의 잠도 잘 자고, 꿈도 안 꾸고 우울한 기분은 잠시 뿐이라고. 생일이라고 이것저것 챙겨준 선물에다 같이 갔던 템플스테이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해 사진 뒷면에 우리의 사이좋을 60대를 묘사한 내용이 들어있는, 감동마저 빼곡한 편지를 적어 주는 친구에게 차마 내 꼬락서니를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다시 화가 났다.
왜? 왜 도대체 먼저 간 거야? 이번 생일에는 명품백을 사주고 엄청 맛있는 걸 같이 먹자고 큰소리 땅땅 치더니, 어디로 가버린 거야? 나보고 아줌마 할머니 관절 조심하라고 그렇게 놀리더니 왜 지금 없는 사람이 된 거야?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무의식의 조종인지 모든 게 꿈인 것처럼 흐릿했다가, 숨이 멎어가는 병원에서의 모습이 떠오르며 머리가 핑 돌았다. 아, 현실이구나. 나는 왜 살고 있지?
생일이 점점 다가오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친구이자 동료이자 동생이자 애인이었던 그가 내 세상에서 그렇게나 많은 감투를 쓰고 있었단 걸 인식하지 못한 벌이었다.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서로의 생일을 잘 챙겼다. 우리는 생일 주간이라고 해서, 생일이 있는 주 내내 생일자 대접을 해줬다. 상대가 아무리 귀찮고 번거로운 부탁을 해도 웃으며 들어주고, 맛있는 걸 사주고, 재미없는 농담을 해도 배꼽이 빠질 것 같다며 큰 리액션을 해주고, 칭찬과 좋은 말만 가득 들을 수 있게 하는 소소하고 귀여운 우리의 이벤트였다.
작년 생일에 그는 나에게 예쁜 금목걸이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전 해에 사줬던, 전 세계 언어로 '사랑해'가 적혀있는 약간은 유치한 목걸이를 사준 뒤 만회하는 느낌으로) 미적 감각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라 몰래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더니, 생일 전까지 사러 갈 짬도 안 나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걸 사주고 싶다며 나에게 현금을 줬다. 그리고 내년엔 명품백을 사주겠다고 기대하라며 큰소리를 쳤고, 나는 기대해 보겠다며 깔깔 웃었다.
지금은 그 유치한 목걸이가 명품 보석처럼 귀하게 느껴졌다. 그냥 너무너무 예쁘고 마음에 쏙 든다고 백번은 말할걸, 문신처럼 항상 하고 다닐걸. 또다시 부질없는 후회의 마음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쩔 도리가 없는데. 현실에서 살자고 애를 써봐도 자꾸만 후회의 모래로 가득 찬 사막 속에 코를 처박고 고개를 들지 않으니, 숨이 막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
종종 전화를 하던 엄마가, 생일선물로 뭐가 갖고 싶은지 물어봤다. 원래 엄마는 생일에 내가 먹고 싶은 걸 해주시고,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선물을 물어보신 건 처음이었다. 기회가 많이 오는 게 아니라며 생각해 보라는 엄마에게 뜨개실과 바늘을 사달라고 했더니 엄마는 실이랑 바늘이면 너무 약소한 거 아니냐고 하셨고, 내가 비싼 실 엄청 잔뜩 살 거라고 하니 엄마도 나도 웃음이 터져 서로 킥킥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실 다섯 개와 바늘, 털실용 가위를 사고 비용을 말했더니 엄마는 그 금액의 5배는 되는, 그가 나에게 금목걸이를 사라며 준 금액과 같은 액수를 보내며 고맙다고 했다. 선물을 준 사람이 뭐가 고맙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이렇게 대답했다.
"에너지 생겨줘서 고마워"
죽을 생각으로 가득 찼다가, 무기력했다가, 과음과 흡연으로 본인을 해치기 바빴던 불효자가 백신을 맞은 순간이었다.
백신을 맞은 인간이 엄마에게 줄 목도리를 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