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웨이드 Sep 18. 2024

8. 위로의 방식

'위로'라는 껍질 안에 들어있던 건



"내가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니네"


어떤 정도를 말하는 건지 궁금하다.

 슬픔의 깊이를 주변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었던 건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슨 마음일까? 그들이 날 만났을 때 예상한 건 식음을 전폐해서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거나, 만나자는 연락의 답이 내 부고 정도는 됐어야 했을까.


위로를 해주겠다며 주변 지인들이 바깥으로 불러내 말없이 나의 말을 기다리기도 하고, 밥을 먹으며 평소와 비슷한 대화를 하기도 했다.


 멘탈이 나가서 그런 건지 이전에는 크게 마음 쓰지 않았을 한 마디 한 마디에 날이 서고, 이게 좋은 위로인데 내가 못 받아들이는 건지 나를 공격하는 위로의 껍질로 덮인 칼날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운동이라도 해봐. 체력을 많이 써야 잠이 잘 오지"


"빨리 일도 시작해야지, 언제까지 쉬려고?"


"나는 남친한테 차여서 코앞에 살아있는데도 못 봐. 자기가  나보다 나은 거야. 이게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 차라리 죽어서 못 보는 게 낫다니까?"


"병원은 가봤어? 근데 내가 봤을 땐 병원 다닐 정도는 아니긴 하네"


"생각보다 잘 먹네~"


 잘 먹는다는 말은 왜 마음에 걸릴까 생각해 보니  그건 내 죄책감이었다. 나야말로 생각했다. 내가 쫄쫄 굶어 누워만 있다가 쓰러져서 영양실조로 한 번이라도 응급실에 실려갔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잘 먹고 다니는 거 같았다. 못 살 것 같다고, 숨 막힌다면서 숨 잘 쉬고 잠도 살만큼 충분히 자고 일도 안 하고 지내면서 뭐가 그렇게 힘든 걸까?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다시 영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에 잘 자라던 마음속의 암덩어리가 성장을 멈췄다. 분명 안 괜찮은데, 그 말을 들으면 좀 안심이 됐다. 핏대를 세우고 큰소리로 나를 탓하던 내 속의 새까만 내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어디 심리학 책에 나오는 좋은 위로의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엔 오래오래 따뜻하게 남아있게 될 것 같았다. 또 하나는 '너 진짜 슬프겠다'. 이건 눈물버튼이었다. 마음이 슬픈걸 누가 알아주기라도 바란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눈물이 끝나면, 왠지 모르게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울 때 잘 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좋은 위로, 나쁜 위로를 구분하는 기준은 상대적인 것 같지만 알맹이가 어렴풋이 보이는 공격성 위로는 상대가 상태에는 관심이 없다는 게 눈에 띄게 티가 났었다. 하지만 최근의 내 상태에서는 그걸 구분할 수도, 방어하기도 어렵다는 게  또 다른 숙제처럼 느껴졌다. 누가 만나자고 하면 이 사람 성향이 어땠는지, 지금 만나면 나에게 좋은 영향일지 고민하지 않고 별생각 없이 쪼르르 나가 어느 날엔 상처받고 오는 나 자신이 괴로웠다.


 위로 공부 좀 하고 만나자고 할 수도 없고, 섭섭하고 힘드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기도 싫고. 나도 내가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주 큰 화도 오랜 시간을 조용히 보내면 저절로 풀어지는 사람이니까, 시간이 오래 흐르면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그냥 자고 일어났는데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7. 너무 슬픈 게릴라 상영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