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디자인> 2019년 3월호
국내에 출간된 디자인사 책들은 주로 바우하우스를 예술과 산업을 연계하고, 기계 생산에 적합한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며 ‘순수한’ 조형 언어를 정립한 주역처럼 그리고 있다. 여기서 바우하우스의 역사는 흡사 사회문제에 참여하고 유토피아적 이상을 추구해나가는 홍길동식 영웅담과 닮았다. 고난을 헤쳐나가는 대개의 영웅들처럼 바우하우스에도 나치의 핍박으로부터 도피하듯 학교를 옮겨 다니고, 교내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홍길동은 소설이지만 바우하우스는 엄연한 역사라는 것을. 바우하우스의 성과와 평가가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사후 주석이 과하게 덧붙여져 포장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유럽 추상미술이 미국을 통해 자유주의의 대표 양식으로 포장됐듯이 바우하우스도 발터 그로피우스나 미스 반데어로에 등이 미국으로 건너가 전파하면서 실제의 성과 이상으로 포장된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바우하우스를 개인사적 측면에서 바라보자. 바우하우스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교사와 학생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누구보다 많은 헌신을 한 것은 역시 학교의 궁극적 비전을 제시한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그의 뒤를 이은 두 교장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와 미스 반데어로에는 재임 기간이 너무 짧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 독일에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은 국립 디자인 학교를 세우고, 젊고 저명한 건축가 그로피우스를 교장에 임명했다. 1918년 전쟁터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제대한 그는 1915년 유명 음악가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 신들러Alma Schindler와 결혼했지만 바우하우스 설립 이듬해인 1920년 이혼했다. 자녀는 자기 자식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나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바우하우스 설립 전후로 그로피우스는 몸과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바이마르 정부는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전후 배상금을 갚느라 학교 운영 자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고 그로피우스는 연일 후원금을 구하러 동분서주해야 했다. 산업계와의 협력을 통해 후원금을 조달하려 애썼지만 교사들이 반발했고 협력은 성사되지 못했다. 생존 앞에서 이념은 무의미했고 학교의 재정 자립도 요원했다. 심지어 나치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선전미술을 선보이며 나치 미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정도였다. 전후 학교 시설은 열악했고 선생과 학생 모두 궁핍했다. 학과장으로 데려온 요하네스 이텐은 디자인보다는 명상과 기도,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이비 교주와 같았다. 학생들은 이텐의 강한 카리스마를 추종했고 수업 내용도 공업 생산이 아닌 표현주의 성향의 공예 학교에 맞춰졌다. 교내에서는 늘 선생 간, 학생 간 이념 갈등으로 반목과 난동이 이어졌다. 나치는 바우하우스의 외국인 교사들을 감시했다. 전후 분열된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돈을 구하느라, 학교 내 갈등을 중재하느라 국립학교 계약직 교장의 생활은 고달팠다. 바우하우스는 한 시대의 디자인 정신이 투사된 완전체로서의 학교라기보다는 그로피우스에게 전쟁과 같은 고통을 주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로피우스가 주장한 미술과 산업의 연계는 두 번째 후원 도시였던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대규모 항공기 공장이 있던 데사우시는 공업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바우하우스를 유치해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마련해주고 신축 교사를 제공했다. 그로피우스는 시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막 꽃피려는 찰나 그로피우스는 시 당국과 계약을 위반하면서까지 바우하우스 교장직을 벗어던졌다. 자기가 세운 학교에서 스스로 쫓겨나다시피 하는 상황인데도 무척 행복해했다고 하니 9년간의 학교 운영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로피우스의 생애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나 예술에 대한 열정보다 궁핍한 학교의 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경영인의 모습이 더 강하다. 개인과 기관을 동일시하기는 어렵지만 완전히 별개의 것도 아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영웅은 사후 후대에 의해 재발견되고 각색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읽는 바우하우스의 낭만적 정열과 개혁가적 이상은 포장된 것일지 모르며, 이들의 성과는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얻은 산물일 수도 있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했고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타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타인의 업적을 무턱대고 폄훼하는 것은 질투밖에 되지 않는다. 또 어느 시대나 정신적 지향점으로서의 영웅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장되고 과잉된 주석은 올바른 역사 인식을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 역사와 소설이 섞이면 종교가 될 수 있다. 100년이나 된 ‘바우하우스교’의 도그마를 이제라도 다시 냉정하게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글 김종균 특허청 행정사무관
©월간 <디자인>
김종균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디자인학 박사를, 충남대학교에서 법학 석사를 마쳤다. 현재는 특허청에서 행정사무관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의 디자인> <디자인 전쟁> 등을 썼고 공저로는 <디자인 평론> 등이 있다. 한국 디자인사와 문화, 상표와 디자인 지식재산권을 주제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