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성 Mar 07. 2021

성폭력 상담소에 전화 건 이유는요

이제는 참지 않으려고요


사건 발생 후 나의 통화 목록



돌아보면 수 없이, 어쩌면 나도 모르게 더 많이 겪었을 일인데. 왜 나에겐 벌어지지 않을 일처럼 마음 놓고 있었을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평화로웠던 그날, 일상을 뒤흔든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난데없이 벌어진 일 같았지만 일상에 도사리고 있던 폭력이었죠.



예뻐서, 딸 같아서 찍었다고요


최근 아이들 방학을 맞아 방문한 한 지역의 도립공원에서 70대 남성이 저와 첫째 딸아이를 동의 없이 무단 촬영했습니다.


'공원해설사'라는 목걸이 명찰을 걸고 있던 그는 둘째 아이와 시소를 타며 놀아주고 있는 저를 먼저 자신의 핸드폰으로 무단 촬영했는데요. 웃으며 대놓고 저를 찍는 모습에 너무나 당황했고 불쾌했습니다. "지금 뭐하냐"고 하니 "아이와 노는 모습이 예뻐 사진을 찍는다"고 당당하게 답하더군요. "찍지 말라" 제지하고 삭제를 요구하며 황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저희와 조금 떨어져 앞서가던 첫째 아이를 일부러 불러 포즈를 취하게 한 후 사진 촬영을 하려고 했습니다. 공원의 구석진 공간에서 부모와 떨어져 있던 아이를 굳이 불러서 말이죠. 저와 남편은 그 모습을 보고 격노했습니다.


즉시 제지하고 경찰에 신고했죠. 공원 담당 직원들도 불러 상황을 알렸고요.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연신 "잘못했다"고 하면서도 저와 제 아이가 "예뻐서, 딸 같아서 찍었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자신은 "사진작가"라며 "이전에도 이렇게 촬영을 해왔다"고도 말해 저희뿐 아니라 공원 직원들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고요.



몰라서 그랬다면 이해해야 하나요


피해 직후부터 벌어지는 허탈한 순간에 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과 담당 직원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어르신이라 잘 몰라 그런 것 같다"는 거였거든요. 피해자에게 그런 말은 문제가 된다고 알려주어야 했죠.


공원 측에는 엄벌을 요구했고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것이며 민형사 소송도 고려하겠다고 했습니다. 형사 처분 가능 여부를 묻는 제게 경찰은"잘 모르겠다"면서 "'불안감 조성' 같은 경범죄로 과태료 5만 원만 내고 끝날 수도 있다"고 했고요. 분노가 좌절과 무기력함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허탈했습니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그날 이 사건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던 첫째 아이는 잠자리에 누워서야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왜 우릴 찍었을까?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많이 놀랐을 텐데 자신의 잘못이냐 묻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끝까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에 더 강력하게 대응했다면 아이까지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 발만 동동 구르다 나중에서야 '왜 그냥 넘어갔지' 자책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딸아이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네 잘못 아냐. 그 사람이 잘못했고 그래서 벌 받았어"라고 당당하게 얘기해주고 싶었습니다.


다음 날, 공원에서 그를 해촉하기 전 저에게 전화해 의사를 묻더군요. 해촉할지, 얼마 기간 동안 교육을 받게 할지요. 기가 막혀 이메일로 같은 내용을 정리해 보내달라 요구하니 그제야 바로 해촉하기로 했다며 공문을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후, 해촉 공문과 그의 사직서를 찍어 보내주며 재발 방지를 위해 앞으로 교육과 점검에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폭력 상담소에 전화 건 이유는요


어느 정도 사건이 일단락된 것 같음에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어딘가 자꾸 마음에 걸리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들었고 제 상황과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 제 분노가 예민한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나의 예민함을 공감받고 위로받았습니다. 인간성을 훼손당한 일. 나는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고 나의 불쾌함은 당연했습니다.


- 대처 과정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불안했습니다

대처 과정을 꼼꼼하게 확인해 주었고 놓친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해자의 핸드폰에서 완전히 사진이 삭제되었는지, 유포되지 않았는지 확실히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듣고 당시 현장에 출동한 지구대에 다시 요청했습니다.


- 법적 처벌 절차와 가능할지 여부가 궁금했습니다

1366 여성긴급전화, 디지털성범죄지원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통해 자세한 고소 절차와 고소 과정에서 우려되는 점 등을 세심하게 안내받았습니다.


- 자기 검열 아닌 확신을 갖고 싶었습니다

피해자임에도 자기 검열하게 되는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피해와 여죄 혹은 재발 가능성에 집중해 확신을 갖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도움받았습니다.


- 분노와 불쾌함, 그리고 억울함이 내 마음을 잠식해 일상에 파고드는 게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여러 차례 상담을 통해 휘둘리고 있던 가치 없는 감정들을 떨쳐냈고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



존엄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인스타그램에 끄적인 글 때문에 주변에 염려를 끼쳤습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안부 묻고 함께 걱정해 준 곁의 친구들, 동료들, 이웃들께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 빨리 마음을 정리하고, 털고 일어날 수 있었어요.


'구구절절 써야 할까'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뭐 이런 일로 난리냐'는 비난이 두렵기도 하지만 여전히 소름 끼치는 그의 얼굴이 자주 떠오르고 괴롭습니다. 최근 당대표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말처럼 "존엄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용기 내 공개적으로 씁니다.


여전히 불편한 응어리가 마음 한구석에 남았지만 다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할 일도 많도, 갈 길도 먼데 이런 일로 얽매이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지만 이 응어리가 되도록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보려고 합니다. 끝까지 책임을 묻고 단죄해 어떤 폭력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성범죄 피해의 경중을 따질 수 없으나 더 큰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다시 한번 위로와 지지를 보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니 빼면 얻는 흔한 깨달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