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간실격>과 달리기의 조합이 남깃 것
틀림없는 계절의 순환은 위로가 됩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지독한 겨울은 기어이 지났고 포근한 봄기운이 스며들었습니다. 일과 건강, 관계가 한꺼번에 어긋나 지옥 같던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나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한층 따뜻해진 날씨는 적어도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즈음 집 앞 천변을 따라 난 길을 걸었습니다. 걷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쪼그라든 마음은 좋아하는 것을 자주 잊게 했습니다. 걷다가 괜스레 기분 좋은 바람을 맞기 시작한 날부터는 조금씩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경쾌한 마음이 어색해 슬며시 뛰다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어느 날은 전속력으로 뛰어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갖고 뛰기 시작한 건 아니라 느슨하게 내버려두었습니다. 며칠을 연속으로 뛰었다가 한참 쉬기도 했다가 2~3일에 한 번씩 뛰기도 하면서 말이죠. 달리다 보니 의욕이 생겼습니다. 5km 완주와 시간 단축이라는 목표를 세웠고 15년 만에 생애 두 번째 마라톤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며칠 쉬고 걷다가 지금은 다시 뛰고 있습니다.
달리면서 음악이나 전자책을 듣기도 하지만 저는 주로 드라마 <인간실격>을 듣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이라 두 번 정주행하고도 틈틈이 꺼내보는 작품입니다. 요즘 드라마 치고는 호흡이 느린 <인간실격>은 의외로 뛰면서 듣기에 좋습니다. 하나하나 공들인 듯한 대사를 놓치기 아까워 귀 기울여 극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육신의 고통과 오래달리기의 지루함을 잊게 되거든요.
누군가는 너무 어둡고 답답하고 자기 연민이 과하다고 평가하지만 저는 그래서 이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갑질 피해, 실직, 유산, 관계의 실패…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이름 붙이기 어려운 자질구레한 고통을 안고 사는 주인공 부정(전도연).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고 절망하고 자책하는 주인공이 끊임없이 번뇌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환멸과 애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몸부림치면서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그리고 기어이 살아갈 이유를 길어 올려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너무 변태 같나요? 하지만 그 모습이 마치 나 그리고 내 주변의 타인들 같아서 나와 현실이 바라는 괴리를 메꿔주는 위로가 됩니다.
<인간실격>의 대사는 분노와 저주, 고통과 외로움이 잔뜩 묻어있으면서도 이면에 평화를 바라는 아주 희미한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화창한 날씨와 풍경 때문인지, 꾸준히 달리기를 한 덕분인지 아니면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제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완연한 여름이 되어 녹음이 울창한 천변 길을 뛰는 요즘은 그 희미한 마음이 더 짙게 느껴집니다. 이전과는 다른 대사가 제 귀와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죠.
“기다리고 싶어요. 사는 게 너무 창피해서 다 끝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냥 기다리고 싶어요. 다 지나갈 때까지. 그게 뭔지 알 순 없지만.”
<인간실격>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던 대사입니다. 한없이 푹 꺼진 지친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지는 문장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다른 대사를 먼저 떠올립니다.
“아직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살아가다 보면 조금은 괜찮은 날과 만나게 될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되지 않을 평화라고 해도 쉬어가서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날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쉬다가 걷는 것처럼 걷다가 다시 뛰는 것처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달리기와 드라마 <인간실격> 듣기의 조합이 ‘조금은 괜찮은 날'을 더 기대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이전보다 더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에 어쩌다 한 발짝 가까이 찾아오는 평화의 순간들을 만끽해야겠다 생각합니다. 한참을 뛰다 어느 날은 지쳐 고꾸라지기도 하겠지만 다시 쉬었다가 걷다가 뛰면 된다고 내 안의 불안을 다독입니다.
계절이 바뀌고 내 마음과 상황이 달라지면 또 다른 대사가 마음을 사로잡을 테지요. 그때는 조금은 괜찮은 날과 만났기를 기대하며, 그때의 문장을 또 기록하겠습니다.
Written by 오늘도 달리며 조금은 괜찮은 날을 만들고 싶은 치즈
드라마 <인간실격> 보고, 듣고 싶다면
ㄴ 넷플릭스
ㄴ 티빙
달리기 효과가 궁금하다면
ㄴ 평범한 사람이 정기적으로 러닝을 했더니 나타난 놀라운 변화 | 유튜브 채널 ‘장동선의 궁금한 뇌’
원작은 아닌, 동명 소설을 (다시) 읽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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