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텐스로그]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를 읽으며 유튜버 파짘을 기다리다
올해 국제 도서전에서 제목만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책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 ‘외로움’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고, ‘끊고’에 이끌리듯 손이 갔으며, ‘끼어들기’에 완전히 마음이 쏠렸습니다.
외로움. ‘핵인싸'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신의 외향형이었던(과거형) 저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외로움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건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면서부터였어요. 빵 부스러기처럼 무언가 조금씩 잃는 느낌이 자주 들었고, 점차 ‘나’라는 존재가 아득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새로 부여된 ‘기혼 유자녀 여성'이라는 역할로 사는 삶은 희망찼던 마음과 달리 전보다 더 부대꼈고, 사회가 정해놓은 ‘중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듯한 불안에 “해 질 녘이면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고는 했지요.
당시에는 외로움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돌아보니 외로움, 그것이었네요. 사회로부터 본격적으로 소외되기 시작한 그때 느꼈던 모든 것들이요. 당시의 감각을 정확히 외로움이라 이름 붙이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는 직감했던 것 같습니다. 동료부터 찾아 나섰거든요. 나처럼 불편한 사람, 불안한 사람, 힘든 사람 그리고 외로운 사람. 알고 보니 비슷한 처지였던 주변 대부분의 여성이 그랬습니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분투가 괴로울지언정 더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또다시 부쩍 외로움을 느낍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친구와 매주 일요일 밤마다 화상 미팅을 합니다. SNS 앱을 열면 수년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의 어제오늘 일상도 금방 알 수 있고요. 어느 때보다 소통이 쉬워진 시대, 그럼에도 어쩐지 문득문득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끼고 맙니다. 최근에는 그 주기가 부쩍 짧아졌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채우는 혐오 범죄와 고독사, 고립 청년 등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외로워집니다. 겉보기엔 외로울 일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제 삶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가 무얼까 골몰할 때, 책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를 만났습니다.
책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는 “외로움은 사회 구조적으로 형성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어쩌면 노인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르는 곳일지도 모를 양로 시설, 장애인 당사자의 대학교 도서관 화장실, 레즈비언 산모의 산후조리원, 한국에선 숨기고 베를린에선 드러내는 여성운동가라는 정체성. ‘사회 구조라는 토대에서 자란 외로움’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작가들의 이어지는 사진과 글은 “외로움은 사회 구조적으로 형성된다”라는 문장을 공고히 합니다.
사회적 배제와 고립, 제가 느낀 외로움의 근원이었습니다. 사회에서 내 자리를 잃는다면 곧바로 내쳐지고 말 것 같은 불안이 밑바닥에 잔잔히 남아있던 외로움을 확 끄집어 낸 것이었죠. 서로의 외로움을 덜어내는 동료를 찾았지만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나이 듦을 마주해야 하는 시기까지 도래하면서 외로움은 갈수록 커져갔습니다.
초여름부터 한동안 열심히 얘기하고 다닌 유튜브 채널이 있습니다. 파짘. 물리적·언어적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와 친척들, 군대에 다녀온 직후 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누나, 장애가 있는 아버지의 암 투병, 1억이 넘는 빚... 이제 갓 서른이 된 청년에게 너무나 가혹한 현실 같았습니다. 이쯤 되면 이어질 문장이 예상되겠지만 제가 이 채널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이유는 반전 때문이었습니다.
무척 내향적으로 보이는 그는 3년 동안 100편이 넘는 브이로그 영상을 유튜브에 묵묵히 올렸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행복, 인연,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한다'는 꽃말을 가진 식물에 물을 주고, 성실하게 출근했습니다. 부지런히 운동도 하며 매끼 자신의 식사를 정성 들여 준비했고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아주 어렵게 아버지와의 관계도 끊었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퇴사를 하고 처음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한 그는 변함없이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냅니다. 커다란 손으로 뚱땅뚱땅 피아노 음을 쳐내고, 생애 첫 마라톤에 나가고, 작은 이동식 반신욕조에 몸을 쉬이면서요.
그가 살아내는 하루하루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작은 종이에 깨알같이 손으로 쓴 내레이션 대본 수십 장을 만지작거리며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꿈을 읊는 목소리에서 저는 기어이 세상을 향해 드리웠던 부끄러운 냉소를 거두고 말았습니다. 책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를 읽은 지금, 돌아보니 그 순간 그가 저의 외로움을 끊어내고 끼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삼라만상이 들끓는 온라인 세계에서 부지불식 맞닥뜨린 타인의 묵묵한 삶이 비대해지던 외로움을 툭 끊어버린 것이죠.
파짘은 3개월 전 마지막 영상을 끝으로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저는 가끔 그의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업데이트를 확인합니다. 그의 안부가 궁금한 사람은 비단 저뿐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의 채널 마지막 영상에 접속해 보았더니 13분 전에도, 3시간 전에도, 1일 전에도, 일주일 전에도 사람들은 그의 안부를 묻는 댓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모습을 보고, 드러내고, ‘서로' 마주 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로움을 끊어내기 때문이다. 외로움의 땅 위에서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자신을 직면하고, 사회에서 자꾸만 감추는 나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 책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 중
아마도 그는 저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알고 있을 겁니다. 사회는 그를 더 자주 감추려 했겠지요. 그럼에도 고립이 아니라 자신을 직면하기로, 드러내기로 그리고 의도치 않게 타인의 외로움을 끊어내기로 선택한 그입니다. 저를 비롯해 파짘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는 이유는 어쩌면 그가 다시 외로움을 끊어내길 바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우리의 외로움을 끊어내고 끼어들어 주었던 것처럼요. 일면식도 없는 완전한 타인이지만 지금 그가 너무 외롭지 않길 바라며 제 외로움을 고백한 이 작은 글로 누군가의 외로움도 끊어낼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written by 오늘도 파짘의 안부가 궁금한 치즈
V 사회 구조적 외로움을 같이 고민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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