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그 삶은 당신의 삶이 아니다 (상)

도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함께 읽기

by 그리다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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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하세요, 그리다에요. 오늘은 간단하게 퀴즈를 하나 풀어보고 시작할게요.


Q. 다음 단어 중 불교에서 유래한 단어는 무엇일까요?

1.언약

2.주인공

3.스승


정답은 바로 2번 주인공(主人公)입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을 주인공이라는 말로 높여 부릅니다.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가 주인 된 삶을 사는 사람이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공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죠. 곁가지로 오답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언약(言約)은 ‘말로써 약속한다’라는 뜻으로 기독교에서 유래되어 약속과 믿음의 표현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스승은 과거 무속신앙에서 유래된 단어로 원래는 여자무당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무당을 무격(巫覡)이라 불렀었는데, ‘무’라는 한자의 뜻이 ‘스승(=여자무당)’이었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오늘은 불교철학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해요. ‘어떻게 내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라는 주제를 갖고 말이죠. 제 글을 몇 번 보신 분들은 아실텐데요, 저는 철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게 철학은 ‘세계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을 다루는 힘입니다. 이러한 자신만의 관점을 가져야지만 스스로 주인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주인공’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내세우는 불교에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많은데요, 도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강신주 저)에 나온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소개해드릴게요.


2.

불교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세요? 승복을 입은 스님들의 모습, 고즈넉한 절의 풍경, 앞에 서면 몸가짐을 경건히 해야 할 것 같은 불상의 위엄 등이 있겠죠. 그렇다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절에 자주 다니는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별로 생각나시는게 없을 거에요.

스님과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합장을 하시고, "성불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보세요.

혹시 절에 가셨을 때 스님들과 인사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보통 합장을 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죠. 별다른 말을 안 할 때도 많지만, 불교도끼리는 일반적으로 ‘성불하세요’라는 인사말을 곁들입니다. 성불(成佛)이란 ‘이룰 성’에 ‘부처 불’이 합쳐진 말인데요, ‘불성(佛性)을 달성해라’, ‘부처가 되라’라는 뜻이랍니다. 불교에서는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이와 같은 주장은 ‘네 안의 부처를 찾아라’라는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우선 집착을 버리라고 합니다. 집착에는 대상이 있겠죠. 수많은 집착 중에서도 모든 집착의 뿌리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변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불변하는 자아’를 산스크리트어로는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아(我)라고 번역을 해요. 불교는 ‘불변하는 자아는 없다’는 무아론(無我論)의 입장을 취합니다. 고정된, 영원한 실체는 없고 모든 것은 각자의 인연이 마주침에 의해서 일어났을 뿐 그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죠.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던 지드래곤의 가사처럼 말이죠. 연기론(緣起論)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나온 거예요.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이것을 보고 ‘왜 영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집착과 고통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거에만 붙들려 있게 됩니다. ‘왜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지 못했을까’라며 과거에 대한 집착에만 빠져있는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영원한건 절대 없어"라던 지드래곤도 깨달음을 얻었던게 아닐까요?


영원한 건 없습니다. 영원한 자아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영원한 진리가 있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고정되어있는 진리는 없고 주체적인 진리만 있을 뿐입니다. 집착을 벗어난 자유로운 마음으로부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초월적인 실체가 있을 것이라 가정합니다. ‘불멸하는 영혼’이 죽음 후에 육체를 떠나 천국에 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초월종교인 기독교가 세계최대의 종교가 된 것도 그 연장선입니다. 한편 이것은 이성의 작동방식이기도 한데요, 인간의 이성은 진리를 파악함으로써 세계를 통제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정함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24시간 긴장하고 살아야 되는데, 이는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인과관계의 진리를 파헤치고자 하죠. 불교는 이와 같은 인간의 본능적 심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4.

본능에 거스르는 만큼 불교적 깨달음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쉽지 않은 일을 이루고자 불교는 자체적인 수행법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는 그 수양의 방법론에 따라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눌 수 있어요. 교종(敎宗)은 불교경전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이해함으로써 이를 실천하는데 집중합니다. 초기불교는 교종의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경전의 문구에만 집중하다보니, 그 해석을 두고 ‘내 말이 맞네’, ‘아냐 내 말이 맞아’라는 식으로 교단 내에서 이데올로기 싸움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다보니 바깥세상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고 스스로 부처가 되려는 노력도 부족해졌죠. 거기다 경전은 문자로 이루어진데다가 서술도 어렵게 되어있어, 문맹자가 많던 과거의 대중들은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답니다.

삼국시대 이래 가장 많이 유통된 경전이라는 '법화경'. 지금 봐도 머리가 핑핑 도는데, 옛날 사람들은 어땠겠어요.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수양법을 내세운 선종(禪宗)이 나타납니다. 흔히 선불교라고 부르는 종파가 바로 선종입니다. 선종의 핵심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인데요, 직역하자면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즉 경전에 기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전에 대한 공부 없이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자동적으로 이뤄질 리는 없으니 개개인은 참선, 일상적 성찰, 또는 깨달음을 얻은 자와의 문답을 통해서 불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죠. 특히 마지막을 선문답이라고 하는데요, 언뜻 보면 뚱딴지같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기 때문에 그냥 들으면 ‘이게 무슨 소리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수수께끼 같은 대화를 보고 ‘선문답 같은 소리’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 것이죠.


5.

대표적인 일화를 소개시켜드릴게요.

옛날옛적에 구지라는 이름의 스님이 살았답니다. 스님에게는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깨달음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검지 하나만을 곧게 펴서 들어 보인다는 점이었지요. 스님과 같은 절에는 동자승이 살고 있었는데요, 스님의 가르침을 몇 번 본 동자승은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한 명의 학인(學人)이 절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스님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동자승에게 “스님이 평소에 어떻게 가르치시니?”라고 물었지요. 이에 동자승은 스님의 행동을 흉내내어 검지를 펴들었습니다. 스님이 돌아오자 동자승은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자 스님은 부엌으로 가서 몰래 칼을 들고와 다시 동자승에게 “얘야, 불법이 뭐라고 하였지?”라고 물었습니다. 동자승은 하던 대로 검지를 폈습니다. 그 순간 스님은 숨겨놨던 칼로 동자승의 손가락을 뎅겅 잘라버렸습니다. 놀람과 고통에 차 도망치는 동자승. 구지 스님이 큰 소리로 그를 불러 고개를 돌리니, 스님은 또 다시 검지를 세웁니다. 그 순간 동자승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얘기를 듣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생각할 거예요. 바로 이것이 선종이 의도한 ‘돌아봄의 순간’입니다. 파격적인 화두를 던짐으로써 이전에 있던 사고방식을 뒤집도록 유도하는 것이죠. ‘스님은 왜 동자승의 손가락을 잘랐을까’, ‘이 이야기가 어떤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일까’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보는 순간부터 깨달음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이를 위해 선종에서는 특유의 질문방식을 사용합니다. ‘A는 B이다’라는 명제가 세상 사람들의 상식일 때, ‘A는 B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는 ‘왜 A는 B가 아닌가?’처럼, 마치 ‘A가 B가 아닌 것이 사실인 것 마냥’ 질문에 함정을 심어놓는 겁니다.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명제를 ‘왜 공부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꼬아놓는 것이죠. 당연히 사람들은 반발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A가 B이다’라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기 위해 ‘왜 A가 B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시작합니다.


*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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