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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ree Baik 애리백 Oct 25. 2020

<고슴도치의 우아함> 시고 매콤한 냉소

프랑스식 허영심을 맛보세요.

수위인 르네는 자신의 고용주인 총 여덟 가정의 구성원들의 시선을 늘 염두에 두며 살고 있다. 평등, 존엄, 박애의 표상인 프랑스도 이면을 보면 그 거친 차별주의가 가려지지 않는다. 부유층의 주택가, 화단의 꽃을 돌보거나 우편물을 대신 받아주며 소소한 건물 편의를 관리하는 수위는 고용주들이 각각 상상하는 가난한 삶을 쉽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누추한 장면을 연출해가며 살고 있다. 보지도 않는 시끄러운 TV 소음을 켜놓는다거나 푹 끓여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을 자신의 숙소 앞에 배치해 놓았다. 이유가 있었다.

“현관 입구에 울려 퍼지는 온갖 세상사 소음만으로도 사회적 위계질서 놀이는 유지되었다. 난 부자들의 저택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니, 가난한 이들이 흔히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상투적인 식재료를 이용한 식생활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의도적으로 ‘무교양’의 수위가 사는 방식을 전시한다. 그것이 ‘타인들의 의혹을 막아주는 필수적인 방벽’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들의 등장은 기대감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하다. 초반부터 시작되는 명석한 수사에 나는 다시 책장을 몇 페이지 앞으로 되돌려 목차를 읽어야 했다. <욕망의 씨앗을 뿌리는 자> 첫 장부터 이 작가가 얼마나 색다른 얼굴과 소리를 제시하는지 남다른 표현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과연 프랑스식 시니시즘은 시고 매콤하다.

“마르크스가 제 세계관을 완전히 바꿔놨어요.” 부유층 청년은 자신의 발견에 완전히 도취되어서는 말을 꺼냈다. 그건 일종의 독백이었다. 상대방의 지식수준이 한참이나 낮다는 전제를 확신하며. 스스로에게 취해있는 청년을 마주 보던 수위 아줌마는 꽤나 고무되어 있는 애송이를 앞에 두고 생각한다. “대大부르주아지의 마지막 트림, 깨끗하고 폐해 없는 딸꾹질을 통해서만 재생되는 트림 같은 청년”. 주인공은 이 문장으로 프랑스 사회의 허세를 마음껏 비꼬고 있었다. 독학으로 많은 지식을 소화한 건물 수위는 청년 앞에서도 위장하고 있다. 꽤 시니컬한 도입부다.

앞으로 들을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이 소설 속 두 명의 인물들이다. 54세 여성, 프랑스 파리의 그르넬가, 안뜰과 정원이 있는 상류층 주거지의 건물 수위인 르네와 그가 관리하는 저택 한 층에 살고 있는 정치인 가정의 허무주의 천재 소녀 팔로마. 이 둘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어떻게든 숨기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살고 있다. 동족들 무리와 비슷한 주변색을 찾아 자신의 몸과 말투에 씌운다. 일부러 문법을 틀리기도 하고, 타인의 실수를 모방하면서. 하지만 어색하다.


공원에서 책을 읽다가 이따금씩 사람도 구경한다



“나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학구열 넘쳤던 내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졸업장에서 끝났다. 그전부터 난 아무도 날 주목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식욕을 느껴보지 못한 자에게 처음 허기가 닥쳤을 때 느낌은 고통이자 환각이다. 우리 집에서 취향의 부재는 허무와 다름없었다. 어떤 것도 나에게 말이 되지 않았고, 어떤 것도 나를 일깨우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파도에 휘말려 떠다니는 허약한 지푸라기 같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책 읽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나만이 아는 독서의 기쁨과 흥미는 꼭꼭 숨겼다. 무기력한 아이는 허기진 영혼이 되었다.” - 빈민 출신의 건물 수위 르네  

“우리 식구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같은 길을 걷는다. 젊어서는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려 애쓰고, 학력을 레몬처럼 쥐어짜 지위를 높이려 애쓰고, 엘리트라는 위상을 확보하려 애쓰고, 이어 평생 그런 희망들을 애써 품어봤자 결국 헛된 것임을 어리둥절 깨닫는다.
스테레오 타입의 가정에서 나는 좌파 지식인의 청개구리 자식이 되고 싶었다. 통찰력 있는 사람은 성공을 씁쓸한 것이라 보며,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항상 성공을 희망하는 것 같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람들이 자기 무능력 혹은 정신 이상을 자기 소신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 프랑스 상류층 정치인 집안의 아이 팔로마

어른들의 권력 놀이를 눈치채고 비웃을 수 있는 열두 살 어린아이는 단순히 행복할 수가 없다.

아빠가 국회의원이고 엄마가 문학 박사라지만 가족 전체가 얼마나 시선을 의식한 꾸밈으로 가득한지 반려 고양이 이름조차 ‘헌법이’다. 살아다니는 비싼 장식품쯤인 것이다. 건물 수위를 대할 때 ‘편견 없는 좌파로 잘 자랐기 때문에 수위 하고도 스스럼없이 지낸다’는 억지 티를 굳이 내야 하는 인물들이다. 달관한 아이 팔로마는 누구에게도 순수하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혼자서 자살 계획을 세우고 언제 실행에 옮길지 고민하는 중이다. 내년쯤으로 D-day를 잡고 어항 속 금붕어가 되지 않으려 한다. 죽음은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성공해야 하니까.

르네는 상류층들이 생각하는 특정 직업군에 대한 전형적인 사회적 믿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에 잘 들어맞는 행동을 보여주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난 거대한 보편적 환상을 회전시키는 여러 톱니바퀴들 중 하나로, 그런 보편적 환상에 따라야 삶이 쉽게 해독된다. 수위들은 늙고, 못생겼고, 무뚝뚝하다고 어딘가에 적혀 있기라도 할 테니까!” 책장을 넘기며 르네의 신랄한 언어들이 내게도 나왔다.

아, 이제야 제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만일 내가 이 책에 부제를 달 수 있다면 ‘프랑스식 허영심을 맛보세요.’라고 적었을지 모르겠다.

그는 수위실을 통과하는 상류층 인물들을 관찰하고 세세히 묘사한다. “고용주 앞에서는 지렁이처럼 꿈틀대면서 이십 년 동안 나한테는 인사 한 번 한 적이 없고, 내가 앞에 있어도 못 번 척하는 양반이다.” 마치 내 주변에도 한 명쯤 있을 것 같은 앞뒤가 다른 인물 묘사의 향연이다.

이같이 소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아래층의 수위 아줌마 르네와 한참 위층 우울한 아이 팔로마가 관찰하고 냉소하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교차 편집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 둘은 아직 서로 만난 적이 없고 이들이 겪는 각자의 수많은 사건과 생각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궁금해졌다. 한 명은 일본 영화를 좋아하고, 또 하나는 일본 망가를 사랑하는 이 고슴도치 둘은 대체 언제 만나게 될까.


책 읽는 호수 돌담



어떤 문장들은 통쾌했다. 사람들의 편견을 잘근잘근 씹어 거울로 보여주니까. 수백수천 년 동안 지속되던 편견, 계급의 힘이 우아하게 언어로 바스라지고 있었다. 이 책이 프랑스 소설인데 원어로는 이 문장을 어떻게 썼을까? 몹시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나? 흔히 사회에서 지속되어온 사회 계층의 기대 행동을 거스르는 행동을 보일 때 사람들은 당황한다. 주로 하류층에 해당하는 경우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고급스러운 예술 취향을 향유한다면? 몇 조각에 100유로를 호가하는 고급 프랑스 과자를 먹는다면?

“부자들의 집은 모든 것이 깨끗하고, 반질거리고, 건강하다. 따라서 파리채의 횡포와 공개적 치욕으로부터 보호받는다.” 부자의 아파트를 관리하는 가정부 친구 마뉘엘라와 홍차와 프랑스식 디저트를 음미한다. 직접 구운 마들렌이 접시에 담아 나오고 라뒤레 마카롱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너그럽게 소비해주는 타자의 모습에도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기함했다. “소설에서 왕자가 여공에서 반하거나 공주가 막노동꾼에게 반하는 일은 있어도, 수위들끼리 반하는 일은 절대 안 생긴다.” 오랫동안 고독한 독신의 삶을 살 것이라는 미래 예측을 해 온 르네가 열일곱 살에 청혼을 받고 파리로 이주해오면서도 끝까지 냉정을 유지한다. “가난하고 못생긴 여자가 똑똑해버리면 우리 사회에 환멸만 느끼다 어둡게 살아갈 것이 뻔한 일이었으니 일찌감치 내 운명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다. 아름다움에는 모든 게 용서된다, 저속함마저도.”
작가의 까다로운 냉소가 하늘을 찔렀고 덩달아 나의 편견도 찔렸다.

외로운 아이 팔로마는 행동 하나하나에 지적 허세가 듬뿍 들어간 가족들과 융합하지 못한다. 예민하고 명석한 아이는 부모와 언니와 주변인들이 공유하는 계급의식과 정서가 기대하는 정상 범주를 벗어났기에 많은 것이 괴로운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데 나는 마디마디를 읽으며 한 가지 갈등에 당도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며 문장마다 박혀있는 날카로운 조소에 환호하던 내가 서서히 시들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타인에 대한 예리하고 미세한 관찰, 그들을 바라보며 조각조각 펼쳐놓은 평가들, 르네와 팔로마가 자신의 생각을 끝없이 풀어놓는 소설의 형식이 나를 점차 지치게 했다.

별안간 인물들이 주던 설득력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빈곤과 사회의 계급에 대해 사람들이 놓지 않는 편견을 경멸하고 감쪽같이 재연하는 동안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가두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렇게 불평을 하더니 말이다. 설마 냉소의 파도 속으로 독자를 익사시킬 셈인가.

이들의 말과 생각이 담을 쌓고 또 쌓아서 독자인 내가 개입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고 느꼈을 즈음 페이지를 확인해보니 150쪽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 사건도 소동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이라니! 갑자기 호기심이 사그라들어 책을 덮었다. 북클럽 모임에는 정확히 책의 절반을 읽고 만나기로 했지만 힘이 나지 않았다.
 
궁금해졌다. E는 왜 북클럽에서 나와 함께 읽을 책으로 이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라는 소설을 골라왔을까. 나는 초콜렛을 베어물며 다음 챕터가 시작되는 <문법에 대하여>를 확인했다. 연달아 등장하는 소제목들이 있었다. ‘껍질 밑에서’, ‘균열과 연속’, ‘은혜의 순간’, 르네와 팔로마의 일상에 뭔가 변화가 올까? 작가는 어떤 장치를 마련해놨을까. 난 참을성이 없는 독자였다.

곧이어 <느슨한 북클럽>의 모임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이 책에는 수많은 프랑스식 디저트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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