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인생』, 린다 그래튼
직장생활은 누구에게나 양면적 얼굴을 들이민다. 힘들지만 보람 있고, 사람때문에 고통스럽다가도 사람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고, 더럽고 치사하지만 먹고 살게 해주니 한편 견딜만하고... 직장인의 신분을 벗고 전업주부가 되고 난 후에도 가끔 꿈속에선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만나곤 했다. 아기 엄마에게는 좀처럼 입을 일이 없는 H라인 스커트에 까만 구두를 신은 단정한 모습으로 말이다. 퇴사를 결정하면서 다시는 조직사회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어깨에 힘을 준 채 다짐을 했었지만 직장생활이란 것에는 분명 어딘가 그리운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면 회식 때 먹었던 한우 꽃등심이라던가...(되돌아보면 참 좋은 회사였다 ^^) 그리운 것은 비단 꽃등심뿐이었을까? 실수투성이 청년의 더디지만 아름다운 성장의 시간들, 적절한 보상과 성취감, 무엇보다 이름과 직책으로 불리며 살아 숨 쉬던 자아...
워라벨이란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야근이 일상인 시절이었기에 입주도우미 이모님을 여왕님처럼 모시고(?) 살았었다. 발을 동동거리며 밤늦게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어두컴컴한 방에 먼저 곯아떨어지신 이모님 옆에서 TV 어린이프로그램을 보며 혼자서 부숭부숭 놀고 있던 3살짜리 딸이 무너지는 엄마 마음도 모르고 꽃 같은 함박웃음으로 맞아주었다. 더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퇴사를 고민했던 과거의 그 선택의 길목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주저 없이 딸의 육아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놓치고 나면 연처럼 휙 하고 날아가버리는 이 땅의 여성들의 커리어와 자아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컸던 것인지 전업주부의 일상에 적응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해야 하는 집이라는 공간이 낯설었고 결코 나의 직무가 되지 않을 것 같었던 집안일에서는 도무지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건강하고 예쁘게 커가는 아이의 모습과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차츰 젖어들면서 전업주부의 길에 연착륙하였고, 나의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생활에 적응을 넘어 만족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 아기는 어느새 내가 챙겨주지 않아도 무엇이든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는 청소년으로 성장하였고 육아와 살림에 물리적으로 할애해야 할 시간도 확 줄었다. 그로 인한 뿌듯함도 잠시, 이제는 삶의 구심점을 다시 나에게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로 가족의 서포터로서 뒷짐만 진 채로 남편과 아이의 성취만을 바라보고 있다가는 먼 훗날 감당할 수 없는 큰 산사태에 휩쓸릴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다시 내 삶을 찾는 것이 남편과 아이, 나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의 성장과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이 마흔에 새로운 진로를 찾기 위해 복잡한 미로 속으로 다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오랜 공백기를 보내고 사회로 복귀하는 만큼 나의 정체성에 대해 깊고 신중하게 들여다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 과정을 건너뛴 채 욕심과 미련의 쇠고랑에 발목을 내어준 채 질질 끌려가 버렸다. 어느 지점에선가 잘못된 길로 발을 들이고 있었지만 미로의 조감도를 볼 시야와 역량이 부족했던 나는 그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효능 있는 인간으로서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싶었고, 물질적 보상에 대한 갈증에 사로 잡혀 버렸다. 그렇게라도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받고 싶었으리라. 조급함과 부족한 자기이해로 인해 저지른 실수는 바로 경솔한 재취업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짧지 않은 경력단절의 고리를 끊었다는 놀라움에 축하인사를 전하기 바빴지만 이렇게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다시 시작한 직장생활은 잠시의 흥분과 기쁨을 던져 주었을 뿐 금세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조직문화에의 적응, 업데이트해야 할 산더미 같은 업무 지식과 관련 법률 공부, 급히 처리해야 할 수많은 업무들, 끊임없이 발생하는 돌발상황들, 도전이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몸과 마음은 이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끼익끼익 쇳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던 남편과 아이도 하루하루 어두워지는 내 모습과 무거워진 집안 공기에 지쳐만 갔다. 급기야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증과 위장장애가 심해져 한 여름밤의 꿈같았던 6개월간의 짧은 ‘경단녀 A의 재취업 도전기’는 그렇게 쓸쓸히 조기 종영되고 말았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 80세가 된 미래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할까요?”
지금 당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미래의 당신이 추궁하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이 말은 언어학적 퍼즐이 아니다. 우리는 이 말이 장수의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한다. 수명이 짧을 때 당신의 정체성은 깊은 통찰이나 변형이 없이도 형성된다. 그러나 수명이 길어지면 당신이 겪는 여러 과도기를 연결하는 고리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본질적으로 남게 되는 ‘당신’이란 무엇인가.
정체성, 선택, 위험의 문제는 길어진 삶을 살아가는데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다. 더 길어진 삶은 더 많은 변화를 의미한다. 더 많은 단계는 더 많은 선택을 의미한다. 그리고 변화와 선택이 더 많을수록, 처음에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덜 중요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정체성에 관하여 이전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전 세대가 가지 않았던 길을 가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나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가 미래를 예측하는 지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 제약이 아닌 선택에 관하여 알고 싶은 사람들, 현재 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미래까지 이어가길 바라는 사람들, 길어진 삶을 저주가 아닌 선물로 만들기 위하여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책이 이러한 선물을 만들어가기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핫스팟』, 『일의 미래』의 저자인 경영학자 린다 그래튼과 동료 교수이자 경제학자인 앤드루 스콧이 함께 쓴 『100세 인생』의 서문이다. '기대수명 100세 시대에 우리의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이슈를 세대별(20대, 40대, 60대) 가상의 주인공의 여러 가지 버전의 인생 시나리오를 보여줌과 동시에 깊이 있는 학문적, 시류적 분석을 통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교육-고용-퇴직이라는 3단계의 삶이 전부였던 이전의 삶이 끝나고 '3단계의 삶 + 과도기'의 반복이 몇 번이나 계속될지도 모르는 다단계의 삶과 금전적 자산뿐만 아니라 비금전적 자산(가정, 건강, 인간관계, 행복 등)의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준다. 우리가 앞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수정해야 할 100세 인생계획에 대해 한번쯤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한 손을 내밀며 친절하게 이끌어 준다. 우리가 책을 덮고 나서도 머릿속 그물망 위에 꼭 건져두어야 할 문장은 아래의 두 문장이다.
'지금 당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미래의 당신이 추궁하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전 세대가 가지 않았던 길을 가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나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길을 잃고 전혀 엉뚱한 길에 발을 디뎌 처절히 실패했던 이유는 바로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추궁을 하며 원망을 할 것인가' 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인생을 걸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지금의 나와 지금의 세상만을 바라보며 번듯한 명함 한 장, 적절한 물질적 보상, 그로 인한 낯 부끄러운 자기 위로가 잃어버렸던 자아와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20대에는 마흔이 되면 세상 만물의 이치를 통달할 지혜를 가진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의 내 영혼의 깊이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100세 인생을 24시간이라는 하루의 시계에 대입하여 계산해보면 마흔이란 나이는 오전 12시에도 미치지 않은 청춘(?)이기에, 또 요즘 유행하는 '어쩌다 어른'이란 말처럼 정신 없이 살다보니 어쩌다 마흔이 되어버렸기에 아직은 이렇게 모자람 투성이려니 하고 싸구려 위안을 삼아 본다. 신통치 않은 몸과 마음이 손을 놓고 드러눕는 바람에 운 좋게도(?) 웃픈 막장드라마는 조기 종영되었지만 그 길을 거치지 않았다면 진짜 나의 길로 들어설 수 없었을 테니 후회는 없다. 이 길로 가면 명함 한 장도 보상 한 푼도 세상이 열광하는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먼 훗날 80세의 나에게 추궁당하지 않을 자신, 이 도전을 후회하지 않고 평생 기억하며 자랑스러워할 자신이 있다. 내 허접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이가 한 명도 없을지라도 자판을 치는 지금 이렇게 많이 많이 행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