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저스』 , 2024, 루카 구아다니노
본 리뷰는 영화 『 챌린자스 』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감상 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랠리를 따라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며 집중하는 관중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인 채 불안한 표정으로 차마 경기를 지켜보지 못하는 타시(젠데이아). 눈앞에서 현재의 남편과 전 남자친구, 두 사랑의 경기가 벌어진다면 누구라도 저런 모습일까. 그녀가 진정으로 이기기를 응원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진정한 승자는 누가 될까.
루카 구아다니노가 스포츠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작품을 통해 잠재된 인간의 욕망과 금기를 탁월하게 그려낸 그이지만 스포츠 그것도 테니스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15금 등급이 말해주듯 대놓고 적나라한 성적인 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하고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게 만들며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일렉트릭 음악과 현란한 카메라 무빙, 감각적인 편집이 관객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든다. 카메라 위로 떨어지는 두 사람의 땀방울이 마치 내 얼굴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볼을 훔쳐 낸다.
이미 십 대 때부터 주니어 대회를 휩쓸었던 타시는 독보적인 테니스 스타로 일찍이 자리매김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과 더불어 매력적인 외모와 분위기로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와 패트릭(조시 오코너) 두 절친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다. 차분하고 성실하며 자상한 아트, 자유분방하고 마초적인 매력을 가진 패트릭. 너무나도 다른 두 남자와 타시는 오랜 시간동안 아찔한 삼각관계의 줄타기를 이어간다.
주니어 대회에서 맞붙은 두 사람 중 이긴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주겠다는 타시. 경기에서 이긴 패트릭은 타시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영혼을 지닌 패트릭과 강한 소유욕과 성공을 향한 야망을 가진 타시의 관계가 평탄할 리 만무하다. 패트릭과 다툰 날, 경기에서 무릎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선수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타시는 우정을 저버리면서까지 자신의 곁을 지킨 아트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다.
타시는 아트의 코치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지만 승승장구하던 아트는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그런 그를 위해 타시는 그를 이길 상대가 없는 챌린저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감을 회복할 것을 권한다. 챌린저 대회에서 맞닥뜨린 상대는 다름 아닌 아트의 절친이자 타시의 전 남친이었던 패트릭. 운명의 장난 같은 경기를 앞두고 세 사람의 욕망과 긴장,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두 사람 중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까?
영화는 한 여자를 향해 두 남자가 그려내는 삼각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욕망 충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것은 타시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계를 제패하고 싶었던 타시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그 꿈을 포기하게 된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정상을 향해 질주하기만 하던 그녀의 좌절감의 크기를 계량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쓰러져 울고 있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는 아트와 결혼을 했고 그의 코치를 맡고 있지만, 잘 나가던 아트마저 깊은 슬럼프에 빠져 버렸다. 그를 통해 자신이 못 이룬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가 따라주지 못하고 있다. 타시가 욕망덩어리라는 것을 잘 아는 아트는 패트릭의 등장으로 더욱 불안에 휩싸인다.
또한, 타시를 향한 두 남자의 사랑뿐만 아니라 죽마고우인 두 남자의 미묘한 케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십 대 시절 패트릭에게 자위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아트, 그리고 대학에 진학한 후 오랜만에 조우한 두 사람의 눈빛과 행동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둘 사이의 텐션이 심상치 않다. 이 삼각관계의 상위에 위치한 꼭짓점 혹은 조종자가 언뜻 보기에 타시인 듯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그저 아이콘처럼 존재하기만 할 뿐 두 남자의 우정과 애정의 위태로운 줄타기가 더 상위에 존재하는 역삼각형의 모습을 한 삼각관계일 수도 있다. 이렇게 세 사람의 관계는 벼랑 위에 놓인 삼각형처럼 아찔하고 위태롭다.
사랑은 타인을 향한 극렬한 욕망이며, 나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아낀다는 것을 의미할까? 누군가는 인간은 사랑 그 자체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욕망이 아닌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까. 남편인 아트를 위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타시. 아트와 패트릭의 경기에서 만약 패트릭이 이긴다면 그녀는 미련 없이 패트릭에게 가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루지 못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테니스는 관계야
사랑과 욕망을 테니스라는 멋지고 섹시한 스포츠에 투영시켜 감각적으로 직조해 낸 구아다니노에게 이제 더 이상 장르의 한계는 없는 듯하다. 무슨 소재든 어떤 이야기든 그의 손길이 더해지니 섹시하고 아름답게 윤이 난다. 치졸하고 추악하고 변덕스럽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간의 모습을 다음번에는 그가 어떻게 담아낼지 벌써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