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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Jun 11. 2024

글을 쓰기 위해서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학창 시절의 글짓기나 일기, 편지 쓰기를 제외하고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제 나이는 42세였습니다. 브런치를 통해서였죠. 평소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적극적인 독서가는 아니었고, 글쓰기 또한 학창 시절과 직장생활을 거치며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내는 정도였습니다. 30대 중후반 즈음 가족 간의 극심한 갈등, 경력 단절 후 전업 주부의 삶 속에 끝없이 하락하는 자존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극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이 찾아왔습니다. 병원을 찾아갈 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누워서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었습니다. 물에 젖은 이불솜처럼 축 쳐지고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옥 같은 일상 속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책장에 손을 뻗어 집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읽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음이 엉망이니 독서가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읽으려고 책을 들었다가도 금방 내려놓기 일쑤였고 그러다 또 다른 책을 뒤적이고... 내용도 주제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조금씩 텍스트들이 차곡차곡 머리에 쌓이고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 같은 책을 만났고 그 책이 제 목숨을 살렸고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한 편의 글을 할애하여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백만 톤만큼이나 무거웠던 제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려놓기까지 꼬박 42년이 걸린 셈입니다. 글을 쓰기까지 왜 그렇게도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걸까요? 가장 큰 장애물은 저의 재능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이 정도 글은 누구나 다  써. 나는 남들보다 재능이 부족해 ‘ 등등... 노력도 시도도 제대로 한번 해보지도 않고 핑계만 늘어놓고 살면서도 가고 싶은 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힐끗거리며 살았습니다. 늦은 나이이지만 운 좋게도 제 등을 떠밀어 키보드에 손을 올릴 용기를 주는 책을 만나 글 쓰는 사람(아직 작가라는 타이틀은 제게는 매우 부족합니다만;;)으로 살고 있는 지금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삶의 충만함을 느낍니다.

  ‘쓰는 삶’을 시작하는 데에도 수십 년이 걸리는 것처럼 한 편의 글,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도 오랜 숙성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박완서 선생의 에세이에 기가 막히게 언급되어 있어 소개합니다.


창작 시간에 선생님이 진저리 치며 싫어하는 것이, 우리 또래들이 경험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허황하고 감상적인 미사여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경험에서 나온 것을 써라. 그리고 쓸 게 생겼다고 금세 쓰지 말고 속에서 삭혀라. 그게 제일 인상적이어서 저는 친구들과 여고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박노갑 선생님의 그 말씀 생각나니? 하고 물어보면 기억하는 친구가 거의 없는데 저는 이상하게 그 말씀을 못 잊습니다. 포도주를 만들 때 너희들 뭐가 필요한지 아니? 물으셔서 포도, 설탕, 소주. 이렇게 대답을 하면 또? 그러셔서 항아리 등, 별의별 대답이 다 나오면 선생님은 포도주는 포도를 버린 것이 땅에 고여 시간이 지나 발효하여 술이 된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면서,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아! 오오! 따위 감탄사를 함부로 쓰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에 감동을 해서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속에서 삭혀서 그것이 발효가 되면 쓰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온다. 폭발이 일어난다. 그것이 안되고 잊혔다면 그것은 포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뭐가 될 것은 반드시 속에서 폭발이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철없는 우리보다는 당신 스스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가 싶어 아직도 기억하고 있고 여러분에게도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전해드리는 겁니다.

-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 ‘나의 경험 나의 문학’  중


 소설가나 영화감독 등 글이나 이야기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어느 날 문득, 혹은 시도 때도 없이 소재나 주제에 대한 영감을 받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다양하고 많을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영감을 받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메모를 해두고 가슴에 담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되뇝니다. 그것이 향기로운 포도주가 될 진짜 포도라면 그것은 가슴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발효되기 시작할 겁니다. 초반에는 시큼하고 고약한 냄새가 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흔들리지 말고 온도와 습도를 잘 유지한 채로 가만히 삭혀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포도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발효되지 못하고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고이고이 쳐다보고 관심을 두고 보니 보글보글 거품이 일며 잘 발효되어 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포도였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글과 이야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진정한 포도인지 아닌지 작가라면 오랫동안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향기로운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과정이 바로 작가의 고뇌와 사고의 과정과 같습니다. 이것을 정말 밖으로 꺼내 놓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겠다는 느낌, 즉 폭발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 때 노트북을 열게 된다면 작가 자신도 놀랄만한 훌륭한 작품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한 편의 글,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기까지 오랜 숙성의 기간이 필요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이끄는 어떤 주제에 매달려 깊이 고민해 보고 생각해 보는 경험만으로도 우리의 영혼과 사유의 근육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글쓰기도 모두 실패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를 이끄는 어딘가로 꾸준히 걸어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을 완성시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믿음이 저를 쓰는 사람으로 만든 것처럼 말이죠.


 떨치려 해도 자꾸만 당신의 마음을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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