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초코바라면
당신은 초콜릿 크림브륄레에요.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주인공 앤(다이안 레인)은 워커홀릭인 영화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과 대학생 딸을 둔 우아하고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다. 남편의 프랑스 칸 출장에 동행한 앤은 컨디션 난조로 다음 행선지인 부다페스트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고민 끝에 다음 행선지인 파리까지 자동차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남편을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때마침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마이클의 사업 파트너인 자끄(아르노 비야르)는 그런 그녀를 기꺼이 자동차로 파리로 데려다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데...
그런데 이 남자,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방금 수확한 신선한 딸기 한 바구니, 갓 만들어낸 소시지와 치즈, 바게트 등 미식의 나라 프랑스의 유명한 먹거리를 한 아름 사들고 와 앤 부부에게 안긴다.
대책 없이 낭만 가득한 프랑스 남자 자끄와 미국에서 온 아름다운 여인 앤의 로드트립이 프랑스의 눈부신 풍경과 음식을 한가득 펼쳐 놓으며 우리를 매료시킨다.
일밖에 모르는 워커홀릭인 남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로맨틱 가이 자끄. 자끄와 앤은 느긋하게 프랑스 프로방스 구석구석 아름다운 풍경과 유적들을 둘러보고 정통 프랑스식 식사를 하느라 7시간이면 도착할 파리를 꼬박 이틀을 걸려 여행하게 된다.
여행 첫날 묵을 호텔의 식당에서 둘만의 로맨틱한 저녁식사 자리. 앤과 자끄는 인생에 대한 얕고 깊은 대화를 나누며 점점 가까워진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가 좋아하는 수많은 종류의 초콜릿 디저트를 먹으며 앤은 나이 듦의 쓸쓸함에 대해 투덜거린다.
남자들은 늘 젊은 여자들만 쳐다보는걸요.
20대가 초코바라면
당신은 초콜릿 크림브륄레에요.
자끄가 연애고수 달변가인지 지혜로운 조언가인지, 그 말이 사탕발림인지 진심어린 말인지는 중요치 않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이는 마흔의 문턱에 닿아 있는데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젊음을 놓아줄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에 우울에 침잠되어있던 내게 이 영화 속 한 문장은 신선한 위안을 주었다.
30대 중후반이 넘어서면 눈가에는 주름이 늘고 여기저기 군살이 붙는다. 직장에선 격무에, 집에서는 육아와 살림에 지친 오늘을 살아가는 또래의 여성들은 외모를 관리할 시간도 에너지도 바닥이다. 체력도 열정도 예전 같지 않다. 커리어도 지지부진하여 창창하고 탄탄한 꽃길을 조망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대로 젊음과 패기를 놓아버리기 억울한 나이가 바로 마흔이다. 평생 청춘일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닥쳐버린 마흔이란... 무작정 피하고만 싶은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처럼 꺼림칙하기만 하다. 공식적으로 서른아홉에 청년기가 마무리되고 마흔이 되면 중년기의 시작이 선언되는 것만 같아서 안 그래도 저어하게 되는 '4'라는 숫자는 더욱 꼴도 보기 싫어진다. 사회적 성공이나 지위, 결혼이나 직업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한 번쯤 마흔 앓이를 호되게 겪는다. 마냥 삼십 대의 끝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있고 싶지만 시간은 쏜살이 아닌 빛의 속도로 흘러간다.
초코바는 바삭하고 발랄하다. 초콜릿, 땅콩, 시리얼, 캐러멜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바삭하고 톡톡 거리는 식감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젊음의 매력과도 닮았다. 또한, 정해진 정확한 매뉴얼에 따라 공장에서 빠른 시간 안에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판에 박힌 주입식 교육의 그늘 아래에서 자유와 사유의 시간을 반납한 채 안쓰러운 10대를 보낸 후 20대를 맞이한 청년들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겉모습은 각각 개성 있고 다른 듯 보이지만 브랜드만 같다면 그 맛 또한 아직은 비슷비슷하다. 숙성에 필요한 시간이 아직은 모자란 탓이다.
그에 비해 크림브륄레는 셰프, 즉 사람이 오랜 시간을 공들여 커스터드크림 만들고 숙성시킨 후 오븐에 구운 뒤, 그 위에 설탕을 뿌려 토치로 그을리는 번거롭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을 거쳐야 완성되는 수제 디저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세월과 풍파에 겉모습은 건조해져 버렸지만 영혼만은 여전히 청춘인 마흔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확연히 다른 겉과 속의 식감은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조화를 이루고 그 풍미 또한 진하고 깊다. 초코바가 꾸밈없이 아기자기하고 톡톡 튀는 싱그러운 매력이 있다면 크림브륄레는 완성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레시피도 복잡하지만 은근하면서도 깊이 있는 맛과 화려하진 않지만 우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큰돈을 들여 의학의 힘을 빌리거나,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죽을 만큼 운동하지 않는 한 주름이나 군살 따위는 하루하루 늘어갈 것이다. 오감은 무뎌지고 인지능력과 체력은 저하될 것이다. 이대로 마흔 이후의 인생은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치닫는 것일까?
육체적 노화는 쓸쓸하고 씁쓸하지만 쌓인 세월과 경험은 그들에게 '다르게 살아가는 법'을 선물한다. 예기치 못한 위기를 극복하는 참신한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으며 웬만한 시련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되고 여러 가지 선택지 중 가장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는 현명한 판단력의 소유자가 된다. 어떤 이의 희끗희끗한 머리와 눈가의 주름이 애처롭지 않고 한없이 그윽해 보이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인 경험과 지혜 덕분이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마치 크림브륄레와 같은 윤기와 풍미가 감돈다.
마흔 이후, 크림브륄레가 되어가는 시간...
온갖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만이 영혼을 덮치는 마흔의 문턱에 위태로이 서있는 이들에게 이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위안인가. 시간과 경험이 쌓여 ‘지혜’라는 이름으로 숙성되어가는 마흔 이후의 삶은 이 영화처럼, 그리고 크림브륄레처럼 깊은 풍미가 감도는 더 없이 아름다운 날들이리라 감히 장담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