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한 문장을 쓰게 될 그 날이 올까

『소설가의 일』, 김연수

by Minimum

비스듬한 햇살때문에 더욱 나른하고 멍했던 어느 오후, 우연히 그를 만났고 그의 영혼에 반해버렸다. 그의 책을 만날 때면 늘 처음엔 흥분에 겨워 책을 들었다가도 얼마 안 가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겨워 완독하지 못했던 작품들도 많았고 완독했더라도 제대로 헤아려 품기 힘들었다. 이렇게 작가 김연수는 심오한 작품 세계로 인하여 거리감이 들다가도 그와 내가 공유(?)했던 시간과 공간이 많아서인지, 유머와 재치 넘치는 반전 매력을 소유해서인지 인간 김연수만큼은 친근하고 웃긴 학교 선배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친근한 매력을 더욱 담뿍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에세이집을 읽는 것이다. 남몰래 간직하고 싶던 나만의 작가는 어느덧 『청춘의 문장들』로 청소년 필독도서의 작가가 되어버리더니『소설가의 일』로 문학을 꿈꾸기만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한량들의 트레이너로 분하여 나타났다. 글과 문장을 사랑하지만 감히 자판에 손을 얹을 재능도 용기도 없는 나에게 김선배는 쉽고 재밌고 편안하게 소설가의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씹어도 씹어도 잘 넘어가지 않는 먹먹한 한 덩어리 숙제를 던져주었다.
늘 글에 대한 동경과 열망을 느끼면서도 재능을 탓하며 노력하지 않고 얄팍한 SNS에만 몰두했던 시절이었다.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글을 쓰지 않기 위해 즉 무엇을 하지 않기 위한 가장 편리한 변명은 바로 재능을 들먹이는 것이라고 따끔하다 못해 쓰라린 충고를 한다. 재능을 탓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누구도 그 집에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떠어떠 하리라고 입에만 올릴 뿐 그 진실은 텅 비어 있는 『검은 집』 같은 것이라고, 원통을 한 바퀴 돌리는 것만으로 경전을 읽은 셈 쳐준다는 몽골 사원의 마니차 (기도를 대신해주는 기구) 같은 것이라고. 그저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찜찜함만을 사면해줄 뿐 진실은 텅 비어 있는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책을 사랑하는 라디오 PD이자 작가 정혜윤은 그녀의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능력은 천부적인 자질이나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잊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데서 나온다고. 또한,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게으름은 자기 자신을 얕보는 정신의 행위’라고 말했다. 재능을 탓하며 게으름만 피우면서 하루하루를 하릴없이 흘려보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올곧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세상에 인정 받고 대우 받을만 한 것들만을 좇고 있었다. 그래서 늘 일상 속에서 버릇처럼 투덜거리며 쉽게 포기하고 돌아섰더랬다. 살다 보면 커밍아웃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때가 온다. 언젠가는 나 자신이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나를 받아들이고 세상에 공표해야 할 날이 온다. 그런 타이밍을 맞이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행운이다. 그것을 잘 받아들이느냐 계속 부인하고 거부하느냐에 따라 삶은 180도 달라진다. 나 또한 재능과 일상을 핑계로 진정한 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고 늘 도망 다녔다. 누군가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누군가는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싶어서, 누군가는 남들을 누르고 그들에게 대접받고 싶어서 제각각의 이유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부인하며 살아간다. 운 좋게도 커밍아웃이 필요한 그 순간을 맞는다면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 자신의 고유한 이데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 영혼의 키는 훌쩍 커질 것이며 상처는 치유되고 삶이 완성될 확률도 높아진다.
글을 사랑하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않은 채 비평이 두려워 우물쭈물 언저리에서만 맴돌던 나에게 선배는 이젠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걱정은 저리 치워버리고 무작정 덤벼보라고 등을 떠민다. 글을 쓰든 그 어떤 일을 하든 결과가 어떠하든 노력하고 도전하는 과정은 나의 일부를 완성한다고.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작가에게는 작품만큼이나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타인의 글들은 내겐 너무 완벽해 보여 감히 자판에 손을 댈 엄두도 못 내고 차일피일하고 있던 나에게 그 어느 위대한 작가도 한 붓에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고, 초고의 토사물에 대한 역겨움을 딛고 그것을 잘 치우고 다듬는 것이 작가가 평생 동안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토닥여주었다. 아직도 앞날이 뿌옇기만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삶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 인생은 어차피 지는 게임, 끊임없이 잃어가는 절망의 여정이다. 꿈을 향해 가는 길, 삶 자체가 고통스럽고 힘겹지만 나의 열정을 담을 수 있는 일을 일관성 있게 해나갈 수 있다면 규칙을 잘 지키면서 제대로 지자고 하루키는 이야기한다. 그 게임에서 제대로 잘 지기 위해서는 규칙적이고 절제된 일상의 힘을 믿고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스스로를 잃지 않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고. 여기에 김 작가가 던져준 뜨겁고 묵직한 숙제에 대한 해답이 있지 않을까?



방황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는 90년대 초 반짝이는 청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목도하면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마음에 품게 된다. 이 한 줄의 문장이 그를 소설가로 만들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의 길을 갈 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쪽을 택할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꿈에 대해서 한 번 더 말할 때, 우는 얼굴로 어둠 속에 서서 뭔가 다른 좋은 생각을 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을 때, 바로 그때 이 우주가 달라진다는 말.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맨 앞장에 인용한 요한복음 12장 24절의 그 말.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90년대 초 꽃 같은 청춘을 저버리고 죽음의 길로 가버린 이들은 이 뜨겁고 먹먹한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햇살아래 널부러지고 햇살처럼 빛나기에도 모자란 20대의 청춘들은 그 질문에 대해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 길이 죽음의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묵묵히 걸어갔던 그들이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환해진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오늘은 기적처럼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길을 부지런하고 열심히 걸어온 사람들의 영혼과 태도와 기억이 쌓이고 쌓여 좀 더 정의롭고 화사한 기운이 지금의 이 세상과 이 공기에 만연하게 된 것이라고.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우리의 노력과 무관한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문장이 쓰이느냐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소설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간다. 그런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노력 역시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내가 쓰는 소설의 결말은 여기까지다. 그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새드엔딩이다. 뭔가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정말 느닷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눈앞에 펼쳐진, 마치 기적처럼 바뀐 세상을 본다. 하지만 그건 절대 느닷없지도 않고, 기적도 아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간절히 소망했던 바로 그 세상이다.


자판에 손을 얹기까지 수많은 세월을 흘려보냈고 그 시작의 이유에는 김 작가처럼 치열한 고민도 명분도 없었다. 단지 글을 너무도 사랑하고, 하고픈 말들로 머리가 들끓어 잠 못 드는 밤이 지속되었을 뿐... 하지만, 무심코 열어젖힌 책 속에 영혼을 뒤흔드는 명제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그 여진은 계속해서 내 영혼을 흔들고 있다. 나에게도 해답은 없다.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내 영혼에 한 문장을 적어줄 수만 있다면 파우스트처럼 내 영혼을 내어 맡기리라.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꿈에 가 닿으려는 노력, 질 수밖에 없는 이 게임에서 발버둥이라도 쳐보는 노력이 나와 우리 모두의 영혼에 어떤 문장을 써 내려갈지 자못 궁금해지는 밤이다. 죽음과 실패의 길로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의 노력, 태도, 기억이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책 속에 무심히 꽂혀 있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결론적으로 나는 불멸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멸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주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계속 불멸할 것이다. 우리들의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서 우리의 기억은 남을 것이며, 우리의 기억을 넘어서 우리의 행위들과 우리가 한 일들과 우리들의 태도는 세계사의 경이로운 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아니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좋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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